전후 평양의 복구건설은 북한에서 아주 중요한 사업이었다. 이를 기록하기 위한 노력도 이루어졌다. 평양 복구건설을 기록한 기록영화로 1954년에는 <평양시 복구>라는 영화가, 1957년에는 <평양이 일떠선다>가 만들어졌다. 당연히 평양 복구 건설의 전모를 그린 작품들이다.
1950년대 평양을 배경으로 제작된 예술영화에서는 복구건설이 한창인 공사현장이 영화의 중요한 장소로 등장한다. 1955년 윤용규 감독이 만든 <신혼부부>라는 영화에서 평양을 방문한 신혼부부가 목격한 평양시 복구 현장에 두 팔을 걷고 나서는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은 이들에게 심리적 변화를 가져오는 중요한 계기로 작동한다. 1958년에 만들어진 <우리 사위, 우리 며느리> 역시 북한 최초의 희극영화로 평양의 복구 현장이 중요한 배경으로 활용된다.
<우리 사위 우리 며느리>의 불가리아어 포스터
사회주의 국가에서 웃음은 선전 선동의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대중들에게 심각한 이야기를 심각한 표정으로 건네는 것보다는 환한 미소와 감미로운 노래에 실어 건네면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었다. 그래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뮤지컬이나 코미디적 요소가 강한 작품들이 중요한 선전용 작품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예컨대 북한 텔레비전 방송에서 방영하는 경희극은 우리나라의 개그 프로그램과 비슷한데, 중요한 선전선동 장르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 사위, 우리 며느리> 평양으로 일하러 떠난 자식들과 이들을 만나러 평양으로 온 시골 어른들이 주인공이다. 평양으로 올라오는 버스에서 초로의 남자와 여자가 자기 자식 자랑을 하면서 티격태격한다. 그러다가 버스가 급정거를 하자 아주머니가 몰래 싣고 온 오리를 초로의 남자가 발로 밟게 되고 이 오리가 버스를 헤집으면서 아주머니는 버스에서 쫓겨나게 된다.
아주머니는 지나가던 트럭을 잡아타고 평양에 도착한다. 트럭에서 내린 아주머니는 그곳 건설 현장에서 미래의 사위가 될 사람을 만나게 된다. 딸은 복구건설에 팔을 걷어 올린 청년과 백화점의 뺀질뺀질한 사무직 청년의 구애를 동시에 받고 있던 상황에서 미래의 사위가 될 사람이 사무직 청년이라고 착각한다. 평양에 도착한 초로의 남성도 백화점의 불친절한 여성이 며느리감인가 보다 착각하고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결국 복구건설에 앞장선 건실한 청년이 사윗감이었고 그 청년의 아버지가 버스에서 티격태격하던 그 초로의 남성이었음이 밝혀지고 이 모든 오해가 풀어지면서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이 영화에서 시아버지 역은 최운봉이 맡았다. 그는 원래 카메라맨이었는데 배우가 부족하던 시절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연기에 소질을 보여 카메라맨을 그만두고 아예 배우가 되었다. 그가 처음 맡았던 배역은 1935년 제작된 <춘향전>에서 운봉 역이어서 예명을 최운봉이라 사용했다. 그는 1940년대 우리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였고, 한국전쟁 중에 북한에 가서 연기를 계속했다.
장모 역을 맡은 배우는 박영신이다. 1930년대 연기파 배우로 명성이 높았고, 해방 직후 북한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연기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그녀는 문예총 중앙위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국립 연극극장 총장을 역임한 인민배우이며, 1967년에는 문화상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