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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Feb 02. 2021

평양 복구건설을 이끈 건축가 김정희

북한영화 이야기 2.  김춘식 연출 <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1987)

  

한국전쟁을 다룬 북한영화들에 반드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미군 항공기의 공습과 무고한 양민에 대한 기총소사 장면이다. 북한 전쟁영화의 클리셰(cliché)처럼 들어가는 이 장면은 북한 영화에서 전쟁의 참상과 미군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요소이다.     

 

실제 전쟁 기간 동안 미군은 어마어마한 폭격을 북한의 주요 도시에 퍼부었다. 1950년 말,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에는 미 항공기의 무차별적인 폭격이 민간시설에까지 이루어졌다. 평양 시내에는 당시 평양 인구수보다 많은 50만 발에 가까운 포탄이 쏟아졌다. 90퍼센트 이상의 건물이 파괴되었고 평양 시민들은 지상에 건물을 세울 수 없어 땅굴을 파고 그 안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모란봉에 있던 모란봉극장이 파괴되자 북한에서는 그 자리에 지하극장을 지었다. 지하극장에서의 공연은 전쟁 기간의 한 풍경처럼 남아 있다.      


폭격 당하는 평양 시가


매일 이어지는 폭격 속에서도 인민들의 생활은 계속되었다. 전쟁 기간 내내 끊이지 않았던 어마어마한 폭격은 북한 주민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미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죽게 되는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그려 넣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였다.      


전쟁의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방법은 전쟁 이전보다 현대적이고 아름다운 도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중공군이 참전하여 전쟁이 장기화되고 휴전을 준비하는 시점에 이미 평양 복구건설계획을 작성할 것을 지시했다. 그 프로젝트를 책임졌던 인물이 바로 건축가 김정희이다.     


모스크바에서 유학 중이던 김정희는 전황이 급박해지자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평양으로 귀환한 그에게 김일성은 평양 복구건설의 총계획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평양은 김정희가 계획한 것에 맞춰 역사적 숨결을 간직한, 현대적이고 아름다운 도시이자 사회주의 심장부로써의 기능과 역할을 갖춘 도시로 만들어졌다. 지금의 평양은 김정희가 계획했던 모습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남한에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유치하자 북한에서도 세계 청년학생축전을 비롯하여 여러 국제대회를 유치하면서 평양을 새롭게 단장하기 시작했다. 평양에 대한 관심이 높던 1987년 북한에서는 현재의 평양을 계획한 김정희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제목은 <한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구성되었다. 1부는 모스크바에서 유학 중이던 김정희(영화 속에서는 김정훈)가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으로 돌아오는 걸로 시작한다. 북한에 도착한 김정희는 전선으로 나가 싸우라는 명령이 아닌 평양 복구의 청사진을 그리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는 미군의 계속된 공습과 관료주의자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심장 평양의 복구계획을 세우기 위한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은 김일성에게 보고하기 위해 산판을 만들던 중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고 평양 복구건설의 청사진을 만들던 사무실까지 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망가진 산판을 보며 망연자실하고 있던 때 전화벨이 울린다.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불에 탄 청사진이라도 보자는 말로 김정희를 격려하고 평양 복구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김정희는 불에 탄 청사진을 들고 김일성을 만나러 가면서 1부가 끝난다.     


전후 평양 복구건설을 성공적으로 끝낸 김정희는 북한의 건축가동맹 위원장, 평양 도시계획국 국장으로 있으며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 전방위적이고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될 때 평양을 떠나게 된다.      


<한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에서 김정훈 역을 맡은 인민배우 김준식


2부는 숙청당한 김정희가 지방에서 생활하던 시기의 이야기를 다룬다. 김정훈은 여전히 열정적으로 지방에서도 활동하고 있지만 중앙에서 지방으로 밀려난 그는 미덥지 못한 사람으로 무시당하기 일쑤이다. 그때 그 지역을 시찰하러 온 김일성이 김정희를 기억해 내고 전화를 걸어 격려한다. 김일성의 격려를 받은 김정희는 안주 지방의 건축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다.     


이 영화에서 김정희 역을 맡은 인물은 김준식이다. 신상옥 감독이 만든 <돌아오지 않는 밀사>에서 이준 열사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이다. 그는 평양 연극 영화대학을 졸업한 후 국립극단 배우로 활동하던 연극배우였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의 이야기를 다룬 <푸른 소나무>에서 김형직 역을 맡으며 북한의 중요한 연기자로 발돋움했으며 이후 영화배우로 전향하여 <돌아오지 않는 밀사>에서 이준 열사 역을 비롯해 중요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북한의 배우로 인민배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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