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이야기 15.
황실 희대가 서대문 안, 그러니까 새문안 지역에 자리했다면 서문 밖에도 극장은 아니지만 영화가 상영되던 곳이 있었다. 바로 프랑스인 마탱(Matin, 馬田)이 운영하던 호텔 애스터 하우스이다. 지금의 대문 로터리 근처 농협중앙회 본부 자리에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는 1907년 무렵 일 년 간 매일 저녁 영화가 상영되었다. 이때 상영되었던 필름은 프랑스 파테사에서 제작되었다. 이 무렵 파테사는 파격적인 방식으로 세계영화시장을 장악하였다. 당시 영화필름의 가격은 런던의 필름마켓에서 정해졌고 런던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에 따라 운송비 등 기타 잡비가 추가 되어 판매되었다. 그러니까 런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극동지역은 필름 값이 가장 비싼 지역일 수밖에 없었다.
1907년 파테사에서는 세계 어느 지역에서든 런던의 필름마켓에서 형성된 필름 가격과 동일하게 필름을 판매하겠다는 정책을 시작한다. 파격적인 가격으로 인해 전 세계 영화관에서는 파테의 영화가 주로 상영되게 되었고 파테는 필름 판매 뿐만 아니라 자사의 카메라와 영사기를 판매하여 큰 수익을 낼 수 있었다. 바야흐로 파테영화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파테에서는 영화기자재와 필름을 판매하기 위해 세계 각처에 지사를 세웠다. 이 무렵 서울에도 파테의 지사가 설립되었다. 그러다보니 서울에 사는 프랑스인이 프랑스 영화회사인 파테사의 필름을 가져와 상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 무렵 서대문에 호텔이 들어선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1899년 제물포에서 노량진까지 경인선이 개통되었고 1년 후 한강철교가 놓이면서 경인선은 서대문정차장까지 연장된다. 서대문정차장까지 기차가 다니게 되자 기차역 앞에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호텔이 지어졌다. 처음 이름은 스테이션호텔, 우리말로 정거장호텔이었다.
대한제국시절 외국인이 인천항을 통해 조선에 들어오면 우선 인천에 하룻밤을 자고 서울로 들어갔다. 인천에는 개항 직후부터 대불호텔이나, 스튜어드호텔, 꼬레호텔 등이 있었다. 그런데 경인선이 개통되면서 시간만 잘 맞추면 인천에 머물지 않고 바로 서울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인천의 호텔업이 침체하고 서울에 호텔업이 성장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호텔이 스테이션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영국인 선교사 엠블리가 지은 것으로 1905년 프랑스인 마탱이 인수하면서 지금도 있는 애스터 하우스라는 호텔 체인에 합류하면서 이름을 애스터 하우스로 바꾸었다.
경인선의 종점인 서대문정차장이 지금의 서대문로터리 인근에 있다 보니 그 부근은 외교공관들이 몰려 있게 된다. 당시 서대문로터리 가까이에 프랑스영사관과 이태리영사관이 있었고, 역에서 내려서 5분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나오는 정동에는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영사관이 밀집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서대문정차장은 외국영사관들로 둘러 쌓인 곳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경인철도의 주된 인물들이 인천에서 서울로 오는 외국인들이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처음 만들어진 전차 역시 종점이 서대문로터리 인근이었다. 기차에서 내려서 바로 전차로 갈아타고 서울로 진입할 수 있게 고려한 것이다. 서대문정차장이 번성하던 당시 지금의 서울역은 남대문정차장으로 불렸다. 용산역과 서대문역의 중간에 있던 간이역이었다. 그러나 경부선과 경의선이 이곳 남대문정차장에서 만나게 되면서 남대문정차장은 서대문정차장을 대신한다. 남대문정차장이 경성역, 지금의 서울역으로 크게 번성하게 된 이유에는 일본인거류지인 남촌과 가까웠다는 점도 있다. 개화기에 번성하던 서대문정차장은 1919년 신촌에서 남대문정차장으로 이어지는 터널이 뚫리게 되면서 폐선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