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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Aug 15. 2021

협률사와 원각사

한국영화 이야기 14.

황실 희대가 만들어지던 무렵 우리나라에 영화가 들어왔다. 1903년 한성전기회사의 콜브란과 보스트윅은 영화를 가져와 동대문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영화를 상영했다. 이때 동대문 전기회사 기계창에서만 영화를 상영했던 것이 아니라 새문안에 있던 희대를 빌려 이곳에서도 영화를 상영했다. 그러니까 서대문과 동대문 양쪽에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을 하나씩 두었던 것이다. 

     

황실 희대의 경우 영화를 상영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화재가 발생해 영화 상영이 중지되었다. 영화 탄생 직후에는 상영 중에 필름에 불이 붙어 큰 화재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필름은 질산염으로 만들었는데 질산염은 화약을 만들 때 활용되는 재료로 화약이 폭발할 때 그 폭발력이 질산염에서 나왔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상영할 때 영사기의 고온의 빛과 열을 다루는데 아주 조심해야 했다.     


협률사 화재를 보도한 황성신문 1903년 7월 10일자 기사


협률사는 수리를 끝내고 다시 재개장했다. 여전히 대중들은 협률사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 밤마다 협률사 공연을 보려는 사람으로 넘쳤고 언론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음부탕자라 불렀다. 음탕한 여자와 방탕한 남자라는 뜻이었다. 러일전쟁 직후에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밤마다 음악소리가 흘러넘치는 게 망국의 징조라 봤던 이필화가 “협률사”를 혁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가 계기가 되어 협률사는 문을 닫게 된다.      


사실 이필화의 상소로 극장이 문을 닫았지만 극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잠시 문을 닫았다가 다시 문을 열면서 군인구락부로 활용되었다. 군인구락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본격적인 흥행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원각사는 최초의 신소설인 <혈의 누>의 작가 이인직이 운영했다. 그는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연극 관람을 즐겼다.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관으로 우리나라로 건너온 후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국민들의 민지를 개량하기 위한 방편으로 연극을 활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일본인의 돈을 끌어들여서 연예회사인 원각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이인직이 원각사를 맡아 운영하면서 우리나라 연극사에서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바로 개관 3개월 만인 1908년 11월에 이인직이 쓴 신소설 <은세계>가 연극으로 공연된 것이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 최초의 연극 공연이었다.      


1912년 6월 원각사에서 유광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사진을 상영한다는 기사(매일신보 1912년 6월 11일자)


신소설 작가로 알려진 이인직은 극장도 운영하고 연극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참여했고 이를 배경으로 크게 출세했다. 이완용의 통역 겸 비서로 있었던 그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입이 되어주었다. 그러한 이유로 강점 직후 지금으로 치면 서울대학교 총장쯤 되는 경학원 대사성에 임명되기도 했다.   

  

러일전쟁 이후 원각사의 주요 프로그램은 단연 활동사진이었다. 이곳에서 최초의 영화인들이 탄생했다. 조선인 최초의 변사라 불리던 우정식도 이 원각사에서 영화 설명을 시작을 했다. 한때 단성사를 운영했던 박정현도 원각사에서 영사기사를 했다.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1912년 박영우 등이 원각사를 빌려 유광관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를 전문으로 상영하기도 했다. 유광관이라는 이름으로 영화 상영을 하던 이곳은 시설이 낙후했다는 이유로 영업 정지되었고 가끔씩 공연장으로 활용되던 중 1914년 화재로 영영 사라지게 된다. 현재 원각사가 있던 곳은 새문안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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