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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Sep 06. 2021

배우 심영의 진짜 이야기

백색테러의 표적이 된 배우 심영 1편

1. 배우라는 운명


1926년 10월, 단성사에서는 <아리랑>이 상영되고 있었다.


영화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미친 최영진(나운규 분)이 지주의 하수인인 오기호(주인규 분)를 향해 낫을 휘둘렀다. 영진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얼마 후. 순사가 정신을 차린 영진을 포승줄로 묶었다. 포승줄에 묶인 영진은 마을사람들을 뒤로 하고 아리랑 고개로 향했다.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영진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노래를 부른다.


흥분된 목소리로 설명하던 변사는 쓸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주문한다. “여러분, 다 같이 <아리랑>을 불러 주십시오.” 변사의 말에 맞춰 악대석에서는 바이올린 선율이 흘러나왔다. 이와 동시에 무대 옆에서는 영화 속의 여배우가 등장하여 슬픈 목소리로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객석에 모인 사람들도 하나, 둘 따라 불렀다. 관객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에는 눈물이 묻어 있었다.


밤공기가 찼다. <아리랑>을 보고 나온 심영은 가슴 가득 묵직한 울분 같은 걸 느꼈다. 인왕산 끝자락을 향해 걸으며 영화가 준 감동을 되새겼다. 신나는 서양영화를 보고 나왔던 여느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신선했다. 영화가 사람을 바꿀 수 있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아리랑>을 통해 느꼈다. 나운규와 같은 영화배우가 되는 건 어떨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배우고 있는 무용에 집중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아리랑>은 무용가가 되려던 심영을 영화배우가 되도록 이끈 영화였다. <아리랑>을 만든 나운규와의 인연은 심영이 배우라는 직업을 운명처럼 만나게 해준 계기였다.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난 심영은 본명이 심재설로 경성제2고보를 다녔다. 아버지가 한때 철원군수를 역임했기에 또래의 친구들보다는 경제적으로 넉넉했고 문화적 혜택도 풍족하게 받을 수 있었다.


1920년대 도시의 젊은이들이라면 매일 밤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는 영화관과 어둠에 속에 쏟아지는, 빛이 만들어내는 이미지(影)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훗날 배우가 된 심영은 자신의 예명을 이미지라는 의미의 영(影)자을 써서 지었을 정도로 영화를 사랑했다. 심영의 주변에도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운규프로덕션에서 <옥녀>를 촬영한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호기심이 동해 촬영장소로 달려갔다.


한강변에서 촬영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나운규는 연출을 하면서 몸소 연기를 하고 있었다. 연출대본도 없이 복잡한 장면들을 능란하게 촬영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일기가 좋지 않았다. 빨리 촬영을 마치려는 듯 나운규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햇볕이 구름에 가려 나타나지 않자 촬영은 중지되었다. 잠시 후 전원 휴식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심심했던 배우와 스태프들은 원형으로 둘러 앉아 오락회를 시작했다. 촬영을 구경하던 청년들도 합세했다. 오락회는 장기자랑 같은 것이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각기 자신이 잘하는 흉내를 냈다.


햇볕을 삼킨 먹구름이 하늘에 가득 찼다. 해가 나올 기미가 없자 나운규도 오락회에 합석했다. 심영도 앞으로 불려 나와 장기자랑을 했다. 무용을 배우고 있던 몸이라 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데 익숙했다. 심영의 연기에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나운규의 흐뭇한 시선이 느껴졌다.


오락회도 파하고 스태프들은 촬영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락회에 합석한 인연으로 심영도 촬영도구를 하나 둘러메고 스태프들과 함께 전차 정류장으로 향했다. 나운규가 심영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학생, 학교를 졸업하거든 영화배우가 되시오. 어떻소?”


<아리랑>의 나운규가 말을 걸어오다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어리바리한 대답을 하며 허둥대었다. 그 모습이 딱했는지 나운규는 “왜 배우가 될 생각이 없소? 잘 생각해 보시오.”라는 답을 남기고 앞으로 슥슥 걸어갔다.


이후로도 심영은 촬영장을 자주 나왔다. 나운규와는 자연 안면을 텄다. 심영은 나운규에게 무용가가 되겠다는 다짐을 말했고 나운규는 배우가 어울린다는 말로 다른 길도 있음을 강조했다.


학교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퍼지던 시기였다. 퇴학자가 속출하던 시기였다. 심영 역시 졸업을 앞두고 경성 제2고보에서 퇴학을 당했다. 도쿄로 가서 세계적인 무용가가 되자고 생각했다. 호기롭게 떠났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서울에서는 넉넉한 삶이었지만 일본에서는 고학생일 뿐이었다. 무용을 배우기 이전에 먼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신발가게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이때의 경험 때문인지 훗날 유명 배우가 된 심영은 한청빌딩 1층에 구두점을 개업하기도 했다.


도쿄에서의 생활은 막막했다. 누군가 하얼빈에 유명한 러시아 무용가가 있다고 그의 문하에서 무용을 배워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을 해주었다. 하얼빈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도쿄를 떠났다.


1929년,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하얼빈으로 가기 전에 부모의 안부를 묻고 친구들과의 작별인사를 위해 서울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그 잠깐의 시간에 나운규와 조우했다. 탑동공원 앞에서 나운규는 도쿄에 갔다던 심영이 서울에 나타난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뛰어 왔다.


“한참을 찾았는데 이렇게 만나는군. 무용을 배우러 도쿄에 갔다더니 언제 돌아왔소?”


나운규의 손에 이끌려 심영은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하얼빈에 러시아 무용수를 소개받기로 했습니다.”


심영은 향후의 일정을 이야기 했다. 나운규는 지금 인천 애관극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조선영화주간을 하는데 영화상영 전에 실연을 하기로 했다며 출연해 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당시는 나운규프로덕션이 해산한 직후였다. 나운규의 방탕한 생활로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떠나버린 상태였다. 주변에는 무대에 세울 변변한 배우가 없었다.


심영은 나운규와 같은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생각에 그날로 바로 나운규와 함께 인천으로 떠났다. 공연은 나운규의 대표작을 토대로 엮은 30분 분량의 무언극이었다. 심영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 역을 맡았다. 간단히 리허설을 마치고 나니 더 긴장이 되었다. 막상 관객 앞에 선다는 것이 마음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이것이 첫 무대였다. 떨렸다.


긴장한 심영을 본 나운규는 “배우는 무대에서 우선 대담해야 하오. 무서워말고 인물을 마음먹은 대로 소박하게 형상하면 되는 법이오.”라는 말로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양손으로 귀를 막게 하고 심호흡을 여러 번 크게 하게 한 후 무대에 서게 했다. 무대에 오르자 곧 마음이 안정되었다. 천생 배우였다. 애관에서 12일간의 공연을 끝내고 나운규와 헤어지는 날, 나운규는 인천역두에서 “꼭 배우가 되어 다시 만납시다.”라는 말로 아쉬움을 달랬다.


https://www.youtube.com/watch?v=cnaRemUkEb4&t=467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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