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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Sep 08. 2021

1930-40년대 조선영화 스타, 심영

백색테러의 표적이 된 배우 심영 2편

 2. 무대에 서다.   

  

1927년 해산한 토월회의 무대 책임자였던 원우전이 박승희를 찾았다. 그는 새롭게 조선극장의 운영을 맡게 된 신용희가 프로그램의 일부를 연극으로 채우겠다는 의사가 있다고 전했다. 조선극장에서 일하는 원우전의 소개로 박승희를 만난 신용희는 조선극장에서 연극을 상연하겠으니 박승희가 그 책임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박승희는 뿔뿔이 흩어진 단원들을 모으고 부족한 단원들은 연구생을 모집하여 채우기로 한다.  

   

나운규의 애관 공연에 동참했던 심영은 배우가 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1929년 6월 토월회에서 연구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심영은 무용을 배우러 하얼빈에 가기로 한 것을 그만두고 토월회 연구생에 지원한다. 조선극장에는 토월회의 연구생이 되려는 지원자가 80여 명이나 몰렸다. 심영은 강석연, 강석재, 최승이, 최은연 등과 함께 당당히 연구생에 뽑혔다.     


조선극장의 무대에서 단연으로 출연하던 심영은 1929년 11월 14일 <간난이의 설움>에 출연한다. 주인공 간난이 역에는 석금성, 정열 역에는 서일성이 맡았다. 이 작품에서 수만 역을 맡아 처음으로 중역을 연기하게 된 심영은 호평을 얻었다.     


“前途가 양양하고 광명이 잇서뵈였다. 초출연으로 어려운 역인만큼 동작이 쾌경히 뵈였다. 이번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잇다. 압흐로도 힘써 돌진함을 바란다.”     


이러한 평가는 심영이 연구생들 중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무용을 통해 배운 몸동작이 무대에서의 연기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어 심영은 토월회의 대표적 레퍼토리가 된 <아리랑고개>에 서사 역을 맡아 비중 있는 조역으로 출연했으며 1930년 <남경의 거리>라는 작품을 통해 드디어 주인공 역을 맡게 된다. 심영이 주인공을 맡게 되자 극단 일각에서는 연구생 출신이 주역을 맡는 것에 대해 반대가 있었으나 연기가 일취월장하고 있는 심영이 중국인 역에 알맞다고 판단한 박승희는 그를 주인공으로 낙점해 무대에 세웠다. 심영은 금방 토월회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무대에서 내려와 분장실에서 분장을 지우고 있었다. 분장실 문이 열리고 나운규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배우가 됐군.”   

  

나운규는 만면에 미소를 띠면서 심영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인천에서 헤어지고 난 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 사이 심영은 나운규의 바람대로 배우가 되어 있었고 나운규는 영화 <아리랑 후편>에 출연했고 <철인도>를 만든 후였다. 이 작품들은 서광제, 윤기정 등 좌익 영화인들과의 논쟁을 촉발하여 지면을 뜨겁게 달구었다. 나운규는 심영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도 사실은 연극을 하려는데 같이 해볼 생각은 없소?”     


나운규는 최승일과 함께 동대문 근처의 미나도좌에서 연극을 하기로 했다면서 심영에게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다. 나운규의 제안은 조선극장 무대에서 한창 주목받고 있는 배우를 미나도좌로 빼오겠다는 것과 같았다. 어찌 보면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심영은 잠시 망설였다.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배우로 이끈 나운규와 함께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섰다. 나운규의 제안을 승낙한 심영은 1930년 8월 토월회의 히로인인 석금성과 함께 미나도좌로 옮겼다.     


1930년 8월, 동대문 근처에 미나도좌라는 영화관이 신축됐다. 미나도좌가 들어선 자리는 원래 권상장이 있었다. 권상장 2층은 연예장으로 운영되었는데 미나도(港谷久吉)라는 일본인 모자상이 권상장을 인수하여 이를 영화관으로 신축한 것이었다.     


영화관을 신축하기로 한 미나도는 조선극장에서 토월회 공연이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 미나도좌에서도 프로그램의 일부를 연극으로 채우기로 하고 최승일과 접촉했다. 이때 프로레타리아 예술가들의 비난에 스스로 프로레타리아 연극을 해보기로 작정한 나운규가 최승일과 손잡으면서 미나도좌 연극부가 조직된 것이다.    

 

미나도좌 연극부의 운영은 최승일, 예술 책임은 나운규가 맡았다. 일본인 흥행사는 나운규의 이름으로 돈 벌 생각만 가득했기에 큰 간섭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운규는 유명한 프롤레타리아 연극의 대본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오트 무레트의 <하차>, 로메르텐의 <탄광부>, 씽클레어의 <이층위의 사나이> 가네코 요분의 <세탁집과 시인> 등이 미나도좌 연극부를 통해 상연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 작품들이 공연되는 미나도좌는 노동자, 인테리, 진보적 학생들로 가득 찼다. 나운규와 함께 하면서 주인공을 도맡은 심영의 연기도 크게 주목받았다.     


나운규는 한동안 열정적으로 연극을 만들었다. <선로공의 죽음>이라는 작품에서 나운규는 늙은 노동자 역을, 심영은 젊은 파업 노동자 역을 맡았다. 내용은 12시간 이상의 가혹한 노동과 가난으로 인해 늙은 선로 노동자가 비참한 최후를 맡고 그에 격분한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와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단행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작품은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들어차는 관객으로 일본인 극장주는 흐뭇했다. 그러나 임석경관은 더 이상 봐줄 수 없었는지 공연을 중지시키고 나운규와 심영을 경찰서로 연행했다. 일본인 극장주가 나서서 금방 풀려났으나 나운규는 연극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나는 그간 하고 싶던 연극을 해보았소. 기회를 봐서 또 만납시다. 조선의 훌륭한 배우가 되시오.”     


나운규는 심영에게 인사하고 극단을 떠났다. 이후 나운규는 일본인 영화제작자 도야마 미츠루(遠山滿)와 손잡고 영화 제작에 나섰다. 일본 극우파 영화인과 손잡은 나운규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이즈음 윤봉춘, 이경선, 주삼손, 이명우, 이구영 등이 너무나도 유명한 신파 레퍼토리인 <장한몽>을 <수일과 순애>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드는데 출연해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심영은 주요 배역은 아니었지만 출연 요청에 응했다. 이 작품은 기술적 완성도로 인해 큰 주목을 받았다. 서항석은 “화면의 밝고 깨끗함으로 얻는 산뜻한 맛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한다.”라고 평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1BAGxJn0x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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