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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Sep 09. 2021

스타로 발돋움하다

조선영화 스타 심영 3.

수일과 순애


3. 명성을 얻다     


기술적 완성도 때문인지 <수일과 순애>는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바탕으로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화조 영화 동인회를 조직한다. 노동자들의 파업과 투쟁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제작하는데 실질적인 어려움이 있는 상황에서 시대극 위주의 작품을 제작하여 그 빈틈을 노려보고자 한 것이다. 1931년 4월 창립된 이 동인회에 심영도 참여했다. 화조 영화 동인회에서는 영화 제작을 준비하면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방송극에도 출연했다. 제목은 <귀향의 도(歸鄕의 途)>라는 작품으로 이운방이 각본을 썼고 심영과 더불어 박제행, 이영철, 강석연, 이경선, 박창혁 등이 출연했다.     


영화 제작을 준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성영화 시기의 스타로 이름이 알려진 이경선이 분주하게 전주를 찾아다녔다. <화륜>을 제작한 통영의 삼광영화사와 이야기가 오갔다. 이운방 각색의 <갈대꽃>을 이구영 연출로 제작하겠다는 합의가 신문에 보도되었으나 곧 엎어졌다. <갈대꽃> 제작이 무위로 돌아가자 이경선은 신흥푸로덕션이라는 간판으로 직접 제작에 나서기로 한다. 그렇게 추진된 작품이 <방아타령>이었다.     


이경선은 지금껏 조선영화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얼굴의 여배우를 찾고자 했다. 심영은 토월회의 스타 박제행과 동경미술학교에 재학하면서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온 김인규와 함께 괜찮은 여배우가 있는지 찾아다녔다. 거리를 가다가도 용모가 단정한 여자면 미행도 하고 사람을 통해 알아도 보는 등 헤매고 다니던 중 배화학교 출신으로 빙과점 점원으로 일하고 있던 김소영을 찾게 된다. 김소영이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승낙하자 영화제작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방아타령>은 이운방 원작을 이구영이 각색하고 김상진 감독, 이명우 촬영의 작품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원군 시대 한적한 시골 마을 옥정리에는 방국(이경선 분)과 항라(김소영 분)가 살고 있다. 결혼을 하루 앞두고 민란이 일어나 마을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마을은 폐허가 된다. 방국은 마을을 떠나 40년을 헤매고 살다가 백발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다. 고향에는 항나가 물레방아를 지키며 살고 있었다. 심영은 방국을 돕다 죽음을 맞는 어부 역을 맡았다.     


<방아타령>은 1931년 11월 6일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이 영화가 개봉되는 날 신흥프로덕션의 배우들로 구성된 신흥극단의 공연이 함께 펼쳐졌다. 이날 상연된 작품은 동학난을 배경으로 한 홍개명 작 <어둠으로>였다. 이 연극에서 심영은 주인공 인삼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짧은 기간 동안 수차례 공연되었을 정도로 탄탄하게 구성된 이 작품에서 심영은 최고의 연기를 펼쳤다. 이후 이 작품은 심영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게 되며 훗날 심영은 이 작품이 가장 애착이 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1931년 12월 흥행사 강천희가 미나도좌를 직영하게 되면서 그 직속으로 중외극단을 조직한다. 강천희는 미나도좌를 직영하기 직전 이동식 소형극장 운동을 주창했던 김유영과 함께 중외영화사를 조직하여 소형영화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다시 극장 운영으로 선회하여 미나도좌의 운영을 맡게 된 것이다. 심영은 중외 극단에 참여한다. 중외 극단의 창립작으로는 <선로공부의 죽음>, <사람 좋은 형리>, <사랑이 깊어 갈 때>, <미친놈> 등이었다. 이중 <선로공부의 죽음>은 나운규와 함께 공연했던 작품이었다. 

    

1931년 만주에서 중국인과 조선인의 충돌로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박승희는 토월회의 재기를 위해 재만 동포 위안을 목적으로 한 토월회 위문공연을 1932년 1월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개최한다. 심영을 비롯해 이소연, 석금성, 강석연, 강석제, 김연실, 박제행, 심영, 윤성묘 등 과거 토월회 출신들이 총출동했다. 자연스럽게 명일극장은 박승희를 중심으로 한 토월회 회원들과 손을 잡고 태양극단으로 개편된다. 1932년 2월 태양극단은 미나도좌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토월회의 진용이 강화되고 안정적인 상황이 되자 1932년 3월 21일 심영, 박제행, 김선영 등은 콜롬비아 레코드의 이원배의 인솔로 레코드 취입을 위해 일본으로 갔다. 그곳에서 <이팔청춘>, <불행한 시인> 등을 취입했다. 이때 녹음했던 <인도의 밤>은 10월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판매 중지와 더불어 모든 레코드를 압수당하기도 했다.     


심영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었다. 나운규, 김연실, 문예봉이 출연하고 이규환이 연출한 <임자 없는 나룻배>가 성공을 거두자 이규환을 중심으로 영화 제작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돈이 문제였다. 1932년 12월 운영진들 사이의 갈등으로 두 달간 문을 닫고 있던 조선극장을 중심으로 극단 명일극장이 설립되었다. 토월회 후신인 태양극장의 심영, 박제행, 서월영, 강석연, 김선초, 김선영 등과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극예술연구회에서 활약하던 김인규가 각각 기존 극단을 탈퇴 후 설립한 단체였다. 이들은 영화계에 이름이 높은 안종화를 초빙하여 영화 제작을 강구했다.     


이때 상해에서 건너온 김광주가 영화를 만들려고 준비 중이었다. 소설가 김훈의 아버지로 유명한 김광주는 길림에서 포리의원을 하던 김동주의 동생으로 상해에서 의학공부를 하던 중 형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화연구로 그 방향을 바꾸어 활약하고 있었다. 이후 영화를 만들어 보고자 상해를 떠나 조선으로 와 있던 그는 명일극장 소속의 단원들과 손잡고 조선영화예술협회를 조직 후 영화 제작을 준비했다. 김광주의 데뷔작이기도 한 이 작품이 바로 <아름다운 희생>이었다. 시나리오 이운방, 촬영 이신웅, 미술은 김인규가 맡았다. 또한 심영을 포함하여 김연실, 김선영, 이경선, 서월영, 박제행 등이 출연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젊은 두 친구 해명(이경선 분)과 세진(심영 분)은 갖은 고생을 해가며 고향을 향해 가던 중 해변에서 투신자살하려는 성화(김선영 분)를 구한다. 성화를 좋아하게 된 해명은 세진이 낮잠을 자는 틈을 타서 그녀를 데리고 도시로 간다. 도시에 도착하여 해명이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사이에 성화는 자신을 괴롭혔던 색마 창배(서월영 분)에게 붙들린다. 위기의 순간 세진이 성화를 구하게 되고 해명과 세진은 성화를 두고 갈등이 폭발하여 결국 결투를 벌이게 된다. 그 순간 성화의 아버지가 나타나게 되고 둘의 싸움은 중단되지만 성화는 아름다운 희생을 선택하게 된다.     


김광주가 연출한 <아름다운 희생>은 1933년 5월에 개봉되었다. 흥행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조선영화예술협회는 문을 닫았고 심영을 포함하여 회원들 다수는 막 영화 제작을 시작한 경성촬영소에 입소하게 된다. 특히 심영은 경성촬영소가 설립되기 직전인 1933년 9월 권투영화 <피 묻은 매트>의 촬영을 이유로 도쿄로 건너가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GbkvXl1tl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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