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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Sep 10. 2021

극단 고협의 대표가 되다

조선영화 스타 심영 4.

라이오 치마약 제공, "은하에 흐르는 정열" 전면 광고


4. 조선 최고의 배우


1933년 9월, 동경으로 건너 간 심영은 일본의 좌익 연극인들과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12월 도하 각 신문에는 심영이 쇼치쿠키네마 소속의 서두성을 통해 신극인협회에 입회하여 다음해 봄에 신극인협회에서 공연하는 <햄릿>에 출연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그러나 신문보도에서 알려진 것처럼 심영이 <햄릿>에 출연했는지, 햄릿 역으로 유명한 스스키다 켄지(薄田硏二)의 지도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심영과 줄 곳 함께 활동하던 박제행, 이경선 등이 이 시기 <청춘의 십자로>와 <전과자> 등에 출연한 것과는 달리 같은 시기 심영의 조선 내 활동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1934년 중반까지 일본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심영이 조선에서 활동을 재개한 것은 1934년 이규환이 연출한 <바다여 말하라>에 출연하면서 부터이다. 

    

<임자 없는 나룻배>를 보고 감동 받은 청년 김영식은 이규환을 찾아가 아버지 유산 전부를 영화제작에 투자하겠다며 영화제작에 나설 뜻을 전했다. 이규환은 김영식의 출자금 2,500원으로 평소 자신이 꿈꿔오던 예술영화를 만들겠다고 마음먹고 청조영화사를 세워 한때 이규환을 중심으로 영화제작을 추진하던 인물들을 모았다. 이때 조선으로 건너온 심영도 이규환의 기획에 참여하여 주인공 역을 맡게 된 것이다.     


<바다여 말하라>의 각본은 안석영, 촬영은 이명우가 맡았다. 심영을 포함하여 현순영, 박제행, 서월영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어촌을 배경으로 늙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여인이 어느 날 마을에 나타난 수상한 남자에게 정조를 빼앗기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 금강산 일대의 풍경을 담기위해 11월의 초겨울 날씨에 강원도 고성에서 로케이션 촬영이 진행되었다. 이때 물에 빠지는 장면을 촬영해야 했던 심영은 물이 너무 차 심장마비에 걸릴 뻔 했다는 웃지 못할 회고를 남기기도 했다.    

 

이규환의 바램과는 달리 예술영화로 야심차게 기획된 <바다여 말하라>는 흥행에서 큰 실패를 하고 만다. 김영식의 전재산을 날리게 된 이규환은 자신을 믿고 거액을 투자해 준 김영식을 위해 남아 있는 포지필름을 가지고 영화 한편을 급조하였다. 그 영화가 바로 <그 후의 이도령>이었다. <춘향전>의 뒷이야기를 상상하여 만든 이 영화는 예상외의 수익을 얻어 김영식의 투자금 일부를 회수할 수 있게 도왔다. 하지만 이규환은 이 영화를 스스로 창피한 영화라 생각하여 상영이 끝나자마자 없애버렸고 한다.    

 

급조한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의 이도령>을 통해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에 걸쳐 조선을 대표하는 한명의 영화배우가 탄생하게 된다. 적은 돈으로 영화를 제작하려다 보니 이규환은 투자자 김영식을 배우로 쓸 수 밖에 없었다. 이규환은 김영식에게 배우로 활약하라며 "홀로 은막에 기린아가 되라"는 의미의 독은기라는 예명을 지어주고 주인공을 맡겼다. 의외로 이 영화에서 연기가 괜찮아서였는지 이후 김영식은 독은기라는 예명으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1940년대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배우가 되었다.    

 

<바다여 말하라>의 촬영이 끝난 후 심영은 <청춘의 십자로>의 제작팀이 다시 결합하여 만든 <은하에 흐르는 정열>에 출연한다. <청춘의 십자로>에서처럼 안종화가 각색과 연출을 맡고 이명우가 촬영을, 이원용, 신일선이 주인공을 맡았다. 마찬가지로 심영의 친구들이라 할 수 있는 박제행, 이경선, 김인규가 이 영화에서 함께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호의 딸 연숙(신일선 분)은 교육자의 아들 순영(이원용 분)과 사랑하고 있다. 수전노와 같은 연숙의 아버지는 순영의 아버지의 교육사업을 훼방 놓는다. 연숙은 금강산에서 큰 사고를 당하게 되고 연숙과 순영의 사랑을 이해한 연숙의 아버지는 순영의 아버지가 하는 교육사업에 투자하지만 끝내 연숙은 숨을 거두고 만다.     


<바다여 말하라>와 <은하에 흐르는 정열>에 출연했던 심영과 박제행은 1935년 8월 신무대의 하기(夏期) 공연에 출연 후 그해 말에 동양극장이 설립되자 동양극장 부속 청춘좌에 입단하게 된다.     


심영을 비롯해 경성촬영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들이 동양극장 청춘좌에 입단하게 된 것은 경성촬영소의 운영자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가 동양극장의 설립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등 경성촬영소와 동양극장 사이에 밀접한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경성촬영소에서는 이경선을 비롯해 박제행, 김인규, 김연실 등 심영과 동고동락을 함께 했던 동료들을 자사의 영화에 출연시키고 있었다. 이중 김연실만 전속배우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동양극장이 설립되자 와케지마 슈지로는 경성촬영소 소속 배우들을 동양극장에 전속으로 두고 촬영이 있을 때마다 그들을 데려다 쓰는 편이 이익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동양극장에서 극단 창단을 위해 배우를 모집할 때 경성촬영소 배우들이 대거 전속배우로 입단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심영을 포함하여 심영과 직간접적인 인연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이 속속 동양극장으로 모였다. 극작가 이운방, 배우 박제행, 서월영, 김연실, 김소영, 김선영 등 토월회 계통의 연극인들이 동양극장에 입사했다. 여기에 조선연극사의 주요배우들도 동양극장에 가담하여 긍정적 의미의 경쟁관계를 유지했다. 이중 청춘좌는 당대 인기 배우들이 모여 있어서 인기가 많았는데 단연 남자배우로는 경성촬영소에서 온 심영과 조선연극사 출신의 황철이 두각을 나타냈다.     


동양극장의 전성기인 1936년은 심영과 황철의 시대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춘향전>에서 황철이 이도령 역을 맡으면 심영은 방자 역을 맡는 식으로 중요 배역을 나누어 맡았다. 여배우 중에서는 차홍녀와 김선영 등이 인기였는데, 차홍녀가 춘향 역을 맡으면 김선영은 향단 역을 맡는 식이었다. 이들이 주인공을 도맡으며 청춘좌의 인기를 이끌었다.     


1930년대는 어느 때보다도 연극이 인기를 끌던 시대였다. 심영은 <검사와 사형수>에서는 사형수 역을, <장한몽>에서는 이수일 역을, <단종애사>에서 성삼문 역을 맡아 인기를 지속했다. 특히 청춘좌 최고의 인기 레퍼토리인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빅히트를 친 1936년의 여름은 그 정점이었다. 그해 심영은 결혼을 하게 된다.     


영화출연에 대한 미련이 많았던 심영도 청춘좌 시절만큼은 연극출연으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그러던 중 1937년 설날 공연 후 맹장수술을 하게 된다. 한동안 활동을 쉬게 된 그는 복귀하지 않고 그해 5월 서월영, 남궁선과 함께 청춘좌를 탈퇴한다.    

   


청춘좌를 탈퇴한 심영은 중앙무대에 합류한다. 중앙무대는 예술성에 치우치거나 상업성에 매몰되지 않은, 중간극을 표방하며 탄생한 극단이었다. 여기에는 심영과 함께 청춘좌를 탈퇴하여 행동을 같이하기로 한 남궁선, 서월영과 이미 한해 먼저 청춘좌를 떠나 있던 박제행, 과거 토월회의 히로인이던 복혜숙이 포함되었다. 또한 극예술연구회를 탈퇴하고 조선연극협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던 맹만식, 이원근, 김일영 등이 합세했다. 이질적인 두 조직이 결합한 중앙무대는 토월회 출신 연학년이 이끌었다.   

  

중앙무대에서 심영의 역할은 단지 일개의 배우로 한정되지 않았다. 일본에 체류하며 츠키치소극장을 중심으로 연극을 했던 심영은 일본 내 조선인극단들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일본에서 활동하다 조선으로 건너온 연극인들과 조선 내에서 활동하던 연극인들 사이를 심영이 연결했을 것이다.     


중앙무대의 창단공연은 1937년 6월 23일부터 4일간 부민관에서 열렸다. 그날 공연된 작품은 <피나무 열매 익을 때>, <바보 장두월> 등의 작품이었다. 심영은 두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중앙무대에서 주인공 역은 심영이 주로 맡았다. 그러던 상황에서 중앙무대를 이끌던 연학년이 사망했다. 중간극을 이끌어갈 중요한 동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극단은 자연 해산상태에 들어갔다. 심영은 이때 고려영화협회의 창립작 <복지만리>의 촬영에 참여하고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1936년 봄으로 가보자. 이창용이 이끌던 고려영화협회에서는 창립작으로 심훈의 소설 <상록수>를 발성영화로 만들 계획을 발표한다. 감독은 원작자인 심훈이 맡기로 했고 촬영은 양세웅, 주연은 강홍식, 전옥으로 확정되었다. 그 외에 이금룡, 윤봉춘, 김일해 등이 캐스팅 되었다. 특히 청춘좌 전속 심영이 특별출연하기로 했다. 심훈은 심영을 만나 <상록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의욕이 대단했다. 그러나 영화를 준비 중이던 심훈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심영은 오랫만에 영화출연이 무산된 것이 아쉬웠다.     


고려영화협회의 창립작은 두 해를 넘긴 1938년에 재개된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상해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전창근이 전쟁의 위험을 피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전창근과 이창용은 학창시절부터 막역한 사이였기에 심훈의 죽음으로 제작이 취소된 <상록수>를 대신하여 전창근이 영화 제작을 맡게된다. 전창근은 도쿄, 조선, 만주를 배경으로 한 거대한 스케일의 드라마를 구상하여 이를 고려영화협회의 창립작으로 만들기로 한다.     


고려영화협회의 창립작인 <복지만리>는 거금 10만원 예산으로 제작이 진행되었다. 연출은 전창근, 촬영은 이명우가 맡았다. 배우진도 훨씬 화려했다. <상록수>에서 주인공을 맡기로 했던 강홍식, 전옥 부부를 포함하여 제2차태평양노조사건으로 수형생활을 하다 출소한 무성영화시대의 스타 주인규가 이 영화로 복귀했고 윤봉춘, 서일성, 박창환, 유계선 등이 합류했다. 여기에 심영이 주인공으로 캐스팅 되었다.     


촬영은 1938년 초가을부터 시작되었다. 첫 촬영지는 두만강 접경지인 함경북도 무산이었다. 이어 개마고원 일대에서 촬영을 한 후 만주로 건너가 신경일대의 만주벌을 배경으로 로케이션 촬영 후 만영에서 세트촬영을 한 후 다음해에는 도쿄로 건너가 촬영을 이어가겠다는 계획이었다. 촬영스케줄이 여느 영화보다 긴 만큼 배우들이 함께 생활하는 시간도 많았다. 자연스레 의기투합하여 극단을 조직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극단의 이름은 고려영화협회에서 따와 고협이라 짓고 그 책임간부로 총무 심영, 경리 주인규, 기획 박창환을 선정했다. 이중 총무를 맡은 심영이 극단의 대표격이었다.     


1939년 2월 극단 고협이 창단되었다. 창단공연은 3월 1일 원산의 원산관에서 있었다. 창단작품은 <쾌걸 웡>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4주간의 북선순회공연이 시작되었다. 지방에서 탄생하여 지방순회로 시작한 신생 극단 고협은 심영을 비롯해 스타들이 즐비했기에 일약 중요 극단의 대우를 받게 된다.     


고협은 “좋은 연극은 좋은 생활에서부터”라는 모토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좋은 연극을 위한 공동생활을 꿈꿨다. 고협에는 주인규, 전창근, 이해랑 등 요시찰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의 후견인인 한청빌딩 소유주인 한학수의 물질적 지원으로 홍제동에 고협촌을 세워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노동과 연극을 함께하는 일본의 전진좌를 모델로 했다. 고협은 전진좌와 마찬가지로 단원들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노동과 연극을 함께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5_yo44Cc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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