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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Sep 11. 2021

심영의 해방 전후

조선영화 스타 심영 5.

<복지만리>에서 강홍식(좌)과 심영(우)


<복지만리>의 촬영은 예정보다 늘어졌다.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일본 정부에서는 필름을 배급하기로 한다. 부족한 필름 배급량으로 인해 일본 내에서는 조선영화가 필요 없다는 “조선영화 무용론”이 대두하였다. 이를 근거로 조선 내 생필름 배급이 일시 중단되어 영화 제작이 중지되기도 했다. 이렇듯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영화 제작과 배급에 문제는 커갔다. 자연스럽게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줄고 이를 대신하여 연극이 공연되었다.     


심영이 출연한 <복지만리>는 우여곡절 끝에 1941년 3월 개봉된다. “내지와 만주로 유랑하는 조선 노동자와 유민의 현실을 리얼하게” 그린 작품으로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5족 협화를 영상으로 그려낸 작품이었다. 이어서 조선군보도부가 제작하고 허영이 연출한 <그대와 나>에 출연했다. 일제의 전쟁 선전과 조선인의 동참을 강조했다. 이후 심영은 일본의 도호영화사에서 제작한 <망루의 결사대>에도 출연했다. 이마이 타다시(今井正)가 연출한 이 영화에서 조선 측 파트너는 고려영화협회의 후신인 고려영화사였다. 고려영화협회가 고려영화사로 바뀌는 과정에서 이창용이 물러나고 최인규가 주도했다.     


이처럼 심영은 일제 말기 조선의 가장 유명한 배우로 소위 친일영화에 단골처럼 출연했다. 이 뿐 아니라 극단 고협에서 제작하는 연극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특히 이 시기는 필름 부족으로 인해 전쟁 선전활동에는 영화보다는 연극의 역할이 중요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일제가 조선의 주요 극단들을 동원하여 3차례에 걸쳐 개최한 조선연극경연대회였다.     


1차 조선연극경연대회는 1942년 9월 18일부터 11월 25일까지 개최되었다. 고협에서는 임선규 작, 전창근 연출, 김정환 장치로 제작된 <빙화>를 가지고 연극경연대회에 참여했다. 러시아 영토에 살고 있는 조선인의 고투를 그린 작품으로 소련 정부의 모진 학대와 잔인한 학살 피해 등을 강조한 작품이었다.     


2차 대회는 1943년 9월 16일부터 12월 26일까지 개최되었다. 고협은 김태진 작, 신고송 연출의 <아름다운 고향>을 출품했다. 이 대회에서 심영은 국어극 연기상인 대화숙상을 받았다. 국어극은 조선어 연극을 공연하기 전에 의무적으로 1막의 일본어 연극을 하도록 한 것을 심사한 것이다. 심영은 일본에서 연극을 한 경험이 있었기에 일본어 연기에 능숙했다.     


제3회 대회는 1945년 2월 초부터 3월 초까지 개최되었다. 임선규 작, 이서향 연출, 강호 장치로 만들어진 <상아탑에서>라는 작품이었다. 심영의 출연 내역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고협의 대표 배우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참한 행위와 그 행위가 지닌 무게감은 작을 수 없었다. 전쟁은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기존의 모든 극단은 해산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의 첨병을 맡던 연극인들이 할 수 있는 일종의 반성이었다. 심영이 이끌던 고협도 문을 닫았다. 해방의 감격이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일상을 되찾기 시작했다. 심영은 1945년 11월 박창환, 김양춘, 임효은, 박영호, 박춘명, 박제행 등과 혁명극장을 조직했다. 그 창단공연작은 박영호 작, 박춘명 연출의 <번지 없는 부락>과 <북위 38도>였다. 이 작품은 해방의 감격을 담고 있었기에 심영의 연기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과장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해가 바뀌어 혁명극장에서는 박영호의 역사극 <님>이 박춘명 연출로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해방 후 처음 맞는 3.1 운동을 기념하여 조선연극동맹이 기획한 기념공연 중 하나였다. 이 작품에 출연 중이던 심영은 괴한의 피습을 당한다. 1946년 3월 14일 밤, 명동의 국제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귀가하는 도중 청계천 광교 다리에 이르렀을 때 괴한이 쏜 총에 맞아 우측 하복부 관통상을 입고 쓰러진 것이다. 범인은 사라졌고 심영은 바로 김성진 외과병원으로 실려 갔다. 응급치료를 받고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지만 오랫동안 병상에서 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훗날 김두한은 자신이 심영을 저격했다는 말을 남겼다.     


권총 피습사건으로 심영은 반년이 넘는 요양 시간 후 1946년 11월 즈음 다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때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혁명극장으로 복귀하지 않고 자신이 주도하는 새로운 극단을 조직하기로 한다. 심영이 만든 새로운 극단의 이름은 민중극장이었다. 심영은 단원을 모아 창단 공연을 준비했다. 심영은 그 해 12월 결성된 연극동맹 서울지부의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서울지부 위원장은 서일성, 부위원장은 심영을 포함해 황철, 박창환, 한일송이 맡았다. 이로써 좌우대립의 한가운데서 좌익 연극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민중극장의 창단공연작은 중국의 극작가 조우 원작 <원야>라는 작품으로 1947년 1월 28일부터 공연되었다. 심영은 안영일 연출, 김일영 장치로 만들어진 이 작품에서 탈주범 역을 맡았다. <원야>를 번역한 김광주와 심영은 예전부터 잘 알던 사이였다. 심영은 김광주가 연출한 영화 <아름다운 희생>에 출연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김광주는 <아름다운 희생>을 만들고 나서 상해로 돌아갔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만주에서 지내던 중 해방이 되자 조선으로 건너온 상황이었다. 조선으로 건너온 그는 조우의 작품을 해방된 조국에 선물하듯 제공했다. 이미 낙랑극회에서는 조우의 대표작 <뇌우>가 김광주 번역으로 공연된 후였다. 김광주는 무대화된 <원야>에 대한 불만과는 달리 심영의 연기에 대해서는 “연기의 구형을 벗어버리고 신경지를 개척해 보려는 심영 씨의 진지한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는 식의 후한 평을 남기기도 했다.     


이어 민중극장에서는 3.1 운동 기념제에 낙랑극회, 민중극단, 자유극장, 혁명극장, 무대예술연구회의 주요 5개 극단이 총동원된 연합공연에 참여한다. 함세덕 각본, 이서향 연출로 만들어진 <태백산맥>이라는 작품에서 심영은 포수의 아들 상식 역으로 출연했다. 이후 민중극장은 <봉선화>, <별 하나> 등의 작품을 공연했다. 그러나 제2차 미소공위가 성과 없이 끝나고 8.15 2주년을 앞두고 미군정이 남한 내의 주요 좌익단체의 간부들에 대해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린다. 조선연극동맹의 간부 심영 역시 경찰에 체포당한다. 이는 심영에게 월북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였다.     


심영은 단독정부 수립을 앞두고 월북을 선택한다. 북한에는 제2차 태평양노조사건으로 복역 후 심영과는 고협에서 함께 연극을 했던 영화배우 주인규가 영화부문 총책임자로 있었다. 이인자로는 <복지만리>에서 함께 연기했던 강홍식이 연출 책임자로 버티고 있었다. 이들은 심영과 막역한 사이의 인물들이었다.     


심영은 월북 후 북조선 국립영화촬영소의 연기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북한 정권 수립 1주년 기념 영화인 <내 고향>에 참여한다. 심영은 강홍식이 연출한 이 영화에서 유격대 공작원 김학준 역을 맡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Vme94yAeLA0&t=929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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