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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Sep 12. 2021

북한에서의 심영

조선영화 스타 심영6편(마지막 회)



1950년 6.25 전쟁이 터졌다. 심영은 서울로 와서 남한의 연극, 영화인들을 모아 북한으로 보냈다. 심영과 직간접적인 인연이 있는 인물들인 최인규, 김연실, 이경선, 독은기, 남승민, 최운봉 등이 북행을 선택했다. 많은 연극, 영화인들이 심영과 함께 월, 납북되다 보니 남한에서 심영은 악명 높은 이름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유엔군이 참전하여 전황이 바꾸었고 이어 중국군이 참전하게 되면서 또 전세가 바뀌었다. 역전에 역전을 거치며 6.25 전쟁은 국제전 양상을 띠었다. 중국군 참전으로 서울을 다시 점령한 북한은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던 문학예술단체의 통합을 추진한다. 그 일환으로 명목상 남아 있던 남한의 조선영화동맹과 북한의 북조선영화동맹이 통합을 결정한다. 심영은 통합된 조선영화동맹의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휴전이 논의되면서 전선의 고착상태가 계속되었다. 북한에서는 장기전을 대비한 선전활동을 강화할 계획을 세운다. 우선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를 과거 만영이 있던 장춘으로 옮겨 극영화 제작을 재개했다. 그곳은 심영이 <복지만리>에 출연할 당시 세트 촬영을 한 곳이었다.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일본 상영 포스터


전쟁 기간 동안 심영은 윤용규가 만든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에서 미군에 대항해 싸우는 세포위원장 역을 맡아 연기했다. 이어서 <정찰병>에서는 미군사단장 역을 맡았다. 전쟁 선전의 최선봉에 서서 북한 정권의 승리를 위해 노력한 것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 끝나고 촬영소도 평양으로 복귀했다. 국립영화촬영소를 재건하면서 기록영화촬영소와 예술영화촬영소로 그 기능을 나누어 재조직했다. 심영은 예술영화촬영소 배우로 소속되었다. 이어 평양연극영화대학이 만들어지자 그곳의 교원으로 교편을 잡고 후진을 양성했다. 그러면서 영화 출연도 계속했다. <벗들이여 우리와 함께 가자>(1960)에서 중국인 왕호 역을 연기했고, <두만강>(1959)과 <다시 찾은 이름>(1963)에서는 지주 역을 맡았다. 강홍식이 연출한 4.19 혁명을 배경으로 한 <항쟁의 서곡>(1960)에서는 교수 역을 맡아 연기했다. 이러한 활동을 인정받아 심영은 1957년 공훈배우 칭호를, 1964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많은 월북 영화인들과 마찬가지로 말년은 행복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김정일이 북한영화를 장악하고 급격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던 시기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71년 7월 24일 사망했다. 환갑을 넘긴 지 얼마 안 된 나이였다.


심영은 북한영화의 태동기에서 천리마 시기까지를 대표하는 배우였다. 그 이전에는 조선 연극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동양극장 청춘좌의 대표 배우이자 고협의 대표라는 위상으로 인해 상업극을 대표하는 인물로 이해되어온 측면이 많았다. 심영의 삶을 차근차근 되돌아보면 이러한 판단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만들어낸 오해 혹은 편견의 소산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물론 북한에서 심영이 맡은 역이 크지 않은 조역에 불과하지만 그의 북한에서의 위상을 생각해 볼 때 식민지 시기 좌익 연극 혹은 영화의 한 흐름에 심영이라는 큰 바위가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https://youtu.be/XW6h0tiEn3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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