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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언 Jan 24. 2023

설 연휴 옛날 영화를 보다

책방 노마만리 이야기 22.

홍콩느와르가 절정으로 치닫던 시절 만들어진 <열혈남아>는 유덕화, 장학우, 장만옥의 인상적인 연기와 형광색 가득한 화면이 보여주는 세기말적 풍경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화였다. 이 영화를 통해 왕가위는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고 이후 만들어진 <아비정전>은 1990년대가 그의 시대가 될 것임을 증명하는 듯 독특한 매력을 풍겼다. 


1994년 작 <중경삼림>은 우리가 왕가위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듯 압도적인 느낌을 주었다. 과감한 구도의 화면과 형광색 가득한 도시의 밤풍경,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매력적인 실내 공간과 습기를 머금은 듯한 축축한 밤공기는 스탭프린팅으로 만들어낸 풍경과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리민”으로 대표되는 올드팝과도 아주 잘 어울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의 영화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류의 느와르 영화 혹은 <지존무상>과 같은 도박영화들과도 달랐다. 그래서인지 그 시대 한국의 젊은 영화감독들은 그의 화면을 모방했고 내 나이 때(50세 전후)의 영화과를 나온 이들 중에는 왕가위의 영화를 보고 영화를 전공하려 마음먹은 사람도 있었다. 


중경삼림 리마스터링


이번 설 연휴에 노마만리 3층에서 식구들과 모여 왕가위의 <중경삼림>을 보았다. 넷플릭스에서 어떤 영화를 볼까 한참을 고르다가 선택한 옛 영화였다. 어려서 비디오가게에 가면 바로 영화를 고르지 못하고 한참을 영화제목만 스캔하다가 어렵게 하나 선택하곤 했는데, 그때가 생각날 정도로 각자의 취향이 다르다 보니 힘들게 고른 작품이기도 했다.


 30년이 지나 다시 본 영화는 마치 처음 보는 영화처럼 새로웠다. 왕페이가 부르는 “몽중인”의 전주가 시작되는 장면에서는 마치 20살 무렵으로 돌아간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요즘 어느 영화, 드라마를 봐도 느낄 수 없던 가슴 떨림을 30년이 다된 오래된 영화를 통해 느끼다니... 흐뭇한 마음에 옆을 보니 함께 영화를 보던 18살의 아들은 집중하지 못하는 듯 연신 핸드폰만 보고 있었다.


두 부분으로 나뉜 이야기는 홍콩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었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시간에 대한 강박은 중국으로의 복귀를 앞둔 홍콩 사람들의 불안을 보여주었으며 영화 속 인물들의 행보는 갈림길에 선 홍콩 사람들의 선택을 암시하는 듯 했다. 30년 전에는 화려한 화면에 가려져 파악하지 못했던 메시지가 지천명의 나이를 앞두고는 보다 명쾌히 보이는 듯 했다.


영화를 보다보니 마지막 장면에 눈이 갔다. 영화의 마지막은 홍콩에 가게를 얻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경찰과 비행기를 타고 홍콩 밖에서의 삶을 살고 있는 여인을 보여준다. 이들의 관계는 사랑이라고 규정하기에는 이상하기만 하다. 짝사랑하는 여자와 실연으로 마음 아파하는 남자 사이에 사랑인지도 모르는 관계가 마치 꿈처럼 흘러갔다. 남자가 사랑을 눈치 챘을 때 여자는 캘리포니아로 떠났고 1년 만에 그들은 그들이 처음 만난 그곳으로 돌아온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잠깐의 만남을 끝으로 다시 헤어질 것이며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삶을 살 것이다. 이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랑이라고 부르기에 이상한 것처럼 홍콩의 위치 역시 이들 남녀 관계처럼 이상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다보면 논리적으로 어긋나는 지점들이 생긴다. 이 이상하기만한 지점들은 감독이 관객에게 묻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왕가위 영화를 재밌게 보았던 20대 시절에는 20대 시절의 어긋난 사랑 이야기 정도로 치부했던 것이 보다 복잡하게 다가온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젊고 아름답기만 한 금성무는 고된 하루를 보낸 40대 임청하의 신을 벗겨주고 호텔을 나선다. 썬그라스를 쓴 채 침대에 쓰러져 자고 있던 임청하는 금성무가 호텔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녀는 정말 쓰러져 자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그의 고단했던 하루를 꿈이라 생각했고 누워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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