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떠나 보내며
일단 이 글을 완성하려면 눈물을 꼭 잠가야 한다. 쓰다 말다 쓰다 말다 몇 번을 반복하고서야 쓰는 글.
내가 ‘방배동 할머니’라고 부르던 우리 외할머니는 나를 키워주신 분이다. 할머니는 엄마의 엄마였고 이모들의 엄마였고 또한 나의 엄마기도 했다. 아기 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했기 때문에 내게는 그냥 '할머니'가 아니라 더 큰 존재였다. 아무튼 우리 할머니는 누가 봐도 굳세고 강하신 분이었다. 그런 건강하신 분이 올해 여름, 느닷없이 뇌종양 선고를 받으셨다. 그리고 길어야 3개월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할머니는 그걸 이겨낼 수 있는 분이라 생각했다. 시한부는 영화 속에서나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하필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에게 그런 단어가 붙어졌다.
정말 하루하루가 무섭게 할머니는 더 아파하셨다. 치료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 호스피스에 가기로 한 전 주에, 우리는 다 같이 이모네 집에서 며칠 시간을 보냈다. 그때의 할머니는 그래도.. 거동이 불편할 뿐이지 전과 똑같았다. 그리고 섬망이라는 증세가 나타났다. 쉴 새 없이 말을 하셨다. 할머니가 어느 중학교에 입학하기로 했던 일, 수학을 뛰어나게 잘했던 일(그래서 특히나 계산을 잘하셨다.ㅎㅎ), 엄마를 낳는데 진통을 몇 시간씩 한 일. 우리가 몇십 년 만에 처음 듣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으셨다. 이렇게 짧을 줄 알았으면 그때 더 많이 이야기를 해달라고 할 걸.
호스피스에 가셔서도 할머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셨던 것 같다. 주위에 한 사람, 한 사람씩 사라질 때에도 할머니는 꿋꿋하게 버티셨다. 이제 아무것도 못 드시기 시작했다. 혈관으로 수액만 들어갈 뿐이다. 그리고 정말 빼짝. 말라가셨다.
"할머니. 지금 제일 먹고 싶은 게 뭐예요?"
"커피. 믹스 커피가 먹고 싶어."
커피 한 잔 타드릴 수 없는 지금 이 상황이 버티기 힘들었다.
울면서 며칠을 보내다가 이내 그 감정마저 익숙해졌는지 이따금씩 웃고 떠들기도 하며 일상을 보내다가, 누워있는 할머니를 생각하곤 죄책감을 느낀다. 그토록 아파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보고 싶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버텨달라는 게 이기적인 마음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점점 3개월이 다가오고 있었다. 할머니 몸에 임종이 다가옴을 알리는 푸른 반점이 생기기 시작한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문 앞에 서 계신다고 했다.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 절대 따라가지 마세요.”했더니 크게 깔깔 웃으시며 “왜?”하신다.
”할아버지는 나중에 만나요. 우리랑 다 놀고.”
내가 이렇게 얘기해서인가? 갑자기 푸른 점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역시 할머니는 강하다고 이렇게 쭉 사실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안심하고 주말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 예쁘게 가고 싶으셨나보다.
할아버지도 많이 외로우셨는지 그렇게 30년 만에 두 분은 재회하게 되었다.
할머니 장례를 다 치르고 유골을 모시고 할아버지가 계신 호국원으로 갔다. 할머니의 유골함을 할아버지 옆에 놓는 순서가 왔을 때, 갑자기 소용돌이 같은 바람이 일었다.
"이모. 할머니 왔나 봐." 모두들 보고 들었다.
할아버지 옆에 있는 할머니를 보니까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 두 분이 함께라 춥지 않겠다.
그날은 유독 하늘이 맑고 푸르렀다. 우리 할머니처럼.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 너무 잘 보일 것 같다.
아직도 방배동 할머니네 집에 가면 할머니가 계실 것 같다. 거기서 잘 지내고 계실 것 같다. 갑자기 할머니 만두가 너무 너무 먹고 싶어지면 어떡하지. 아니 할머니 품이 너무 그리워지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