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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은 Oct 17. 2020

16. 아, X됐다

프리랜서로 살아남기2

X 됐다. 


저는 개인적으로 참 이 말을 좋아합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딱 이말만 떠오르거든요. 사실 이말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정신 차리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올 가을은 29년 인생 통틀어 괴로웠습니다. 딱히 뭐 한것도 없는데 시간은 빨리 가는거 같고, 뭔가 지치는데 뭐 때문에 지치는게 뭔지 모르겠고. 쓰고자 했던 글들은 속도가 더뎠고, 생계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사람이 질려 나오게 되고, 다시 구직활동을 해야 한다는 점이 제 목을 조여왔습니다. 누구라도 나의 길을 알려주거나 밝혀주면 참 좋을텐데..제대로 된게 단 한 개도 없는 그런 날들의 연속이니. 광활한 바다 위를 이유없이, 목표없이 떠돌게 되었으니 한마디로 X됐거죠.



이정표 없는 삶

사실 언제까지 이런 떠돌이 삶을 유지할지 걱정이 많았습니다. 위에서 잘 알려주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믿고 따르거나 아니면 함께 걸어가는 맛이라도 있을텐데. 프리랜서의 삶은 때로는 상사로, 때로는 부하직원으로, 때로는 일용직으로, 때로는 알바로... 여러 색의 탈을 쓰고 등장해야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번에 상주한 회사에서 만난 주니어가 계기가 되었던거 같습니다. 입장, 경력, 실력 차이 모든건 다 인정할 수 있고, 일도 어려운건 아니었습니다. 저에게 직급은 중요하지 않았고, 협업만이 필요했거든요. 그런 주니어가 저를 경쟁상대로 여겼을수도 있다는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꼭 이상한 옷을 입은 기분처럼 말이에요. 


자존감이 무너졌습니다. 와르르 소리가 들릴 정도로 너무 힘들어서 9월, 10월 내내 공황장애 약을 먹어야 잠들 수 있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간 큰 증상 없이 잘 지냈는데 갑작스럽게 약을 먹는 저를 보고 애인은 걱정스레 물었습니다. 



도망치는게 비겁한건 아니야

고마운 말이었습니다. 퇴사를 결정하기 까지 애인의 도움도 있었습니다. 다시 조직에서 으쌰으쌰 해보고 싶다는 말에 응원도 많이 해줬습니다. 좋은 회사로 이직할 수 있도록 제 이력서도 관리해주기도 했거든요. 


"일이 실패한게 슬픈게 아니라 내 마음이 다해서 또 실패라고 생각하는 내가 싫어"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애인은 제 얘기를 묵묵하게 들어줬습니다. 하염없이 창문 밖을 바라보는 저를 보면서 조용히 그가 말을 했습니다.


"도망친게 비겁한건 아니야. 당신이 정직했으니까. 그러니까 나쁜건 아니야. 하고 싶은대로 해. 당신 마음이 더 소중해"


그렇습니다. 저는 제 마음이 더 소중한지 모르고 자꾸 이렇게 꼬여버린 상황에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풀리지 않는 마음들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습니다. 



네 마음이 제일 소중해

사실 애인의 말이 더 와닿았던 이유는 엄마가 먼저 얘기해줬기 때문입니다. 결국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제가 엄마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한풀이를 했습니다. 직장 생활만 30여년을 넘게 해오신 엄마는 제 목소리 톤만 들어도 어떤일이 생겼는지 아시는 분입니다. 엄마는 화를 내는 저를 조용히 재우고 다음날 아침 이런 카톡을 보내주셨습니다. 


내 마음을 내가 더 고통스럽게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미 망친 일을 보고 울먹거릴 수도 없고요. 그렇다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파트너에게 내 감정만 들이밀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도망이라는 카드를 꺼냈던 거였는데. 여전히 잠재워지지 않는 상처에 이렇게 불쑥불쑥 화가 올라왔으니. 


이제는 타인의 상황보다는 제 마음이 다치지 않게 하는게 중요하다는걸 알았습니다. 결국 벌어진 일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고 깨끗하게 일어설 것. 어쨌든 내 마음이 우선이라는 것.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자꾸 기억해두면 다음 스텝은 어렵지 않게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X된건 맞다. 그렇다면... 튀자!

어쨌든 저는 수요일에 퇴사를 하지만 X된건 맞습니다. 아직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남아있거든요. 마음이 내키지 않을정도의 일들이 남아있지만 기왕 이렇게 된거 쿨하게 해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내 책임이 아니라면 다 떠안을 필요도 없다는걸 알았으니까요. 여유를 갖고 상대방을 바라보기 위해 저는 한걸음 더 물러서고, 도망치기로 했습니다. 


어리석다해도 좋습니다. 어차피 X된건 맞거든요. 내 일에서 최선을 다했고, 상대방을 더이상 설득할 자신도 기운도 없다면 내가 기꺼이 자리를 털고 가는게 맞습니다. 타인이 무슨 소용이고, 타인의 입장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일에 있어서만큼 정직하고 착실하게 해내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노력한 내가 제일 중요한데. 찬찬히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 화이팅 하면서 잘 마무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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