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마크호텔

by 박상하

이따금 호사스러운 공간에 몸을 맡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면 씨마크호텔을 찾는다. 바닷가 언덕에 빛을 받아 반쯤 투명한 듯 하얗게 빛나는 건물. 주변 다른 건물들과는 격이 다른 귀족같이 고고하다. 프리츠커 상 수상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의 작품이다(최근 강릉에 문을 연 솔올미술관도 그가 설립한 회사에서 설계한 건물이다. 다만 그는 이미 은퇴했다). 실내 인테리어는 디자이너 이상철 선생님께서 담당하셨다 들었다. 강릉집을 마련하기 전에도 마음이 헛헛해지면 오전 근무를 마치고 한계령을 넘어 이곳까지 달려와 혼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식당에서 바로 곁까지 다가온 바다가 보인다. 바닷가를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복잡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저들 모두 각자 감당해야만 하는 삶의 짐이 있을 것이다. 햄버거에 딸린 감자튀김을 잘근잘근 씹는다. 이때만큼은 얼음 띄운 콜라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료이다. 배를 채우고 호텔 내부를 걷는다.


머리 위에 천장을 이고 살던 평소와 다르게 높다란 천장 아래에서 천천히 걷는다. 주차장 한 층 위 복도 끝 컨벤션 센터 문을 밀고 나선다. 왼편으로는 푸른 바다가 오른편으로는 검은 산줄기가 펼쳐진다. 저만치 산등성이 위 얼마 남지 않은 눈이 하얗게 빛난다. 그 곁에서 팔랑 팔랑 풍력 발전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여기 바다로부터 저 산맥까지의 땅이 강릉이다. 그 넉넉함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계단을 따라 아래로 천천히 돌아 내려온다. 호텔 언덕을 따라 자리 잡은 소나무가 바다와 흰 건물과 잘 어우러진다.


로비 라운지 앞 조그만 못에 비친 하늘이 새파랗다. 바람이 불면 잔물결이 자작자작 인다. 윤슬이 빛나고 때론 공간 이곳저곳에 흔들흔들 빛살이 그려진다. 바람이 흐르고 시간도 흐른다. 나무를 통으로 쓴 길쭉한 테이블이 로비를 채운다. 동해 - 태평양을 감상하라는 듯 한쪽 편에만 의자가 놓였다. 엄마와 딸이, 남자와 여자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는다. 마주보는 평소와는 다른 대화가 오갈 것만 같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못을 스치고 지나가며 물결이 일렁인다. 강릉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었으면.


엘리베이터 곁에는 정주영 회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삼십 대 후반의 사내가 금강산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다. 여럿이 함께 찍은 사진이지만 한눈에도 누가 그인지 알 수 있다. 떡 벌어진 가슴과 굵은 팔뚝에서 자신감이 넘친다. 저런 인물들이 한국의 현대를 이끌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영웅들이 저러했을 것인가. 이 호텔은 옛 현대호텔 자리에 들어섰다. 오래전 정 회장이 연수 온 신입사원들과 샅바 드잡이하며 씨름했다는 곳이다. 휴전선 이북 강원도 출신인 정 회장은 강릉에 애정이 깊었다. 인구 20만을 겨우 넘기는 도시에 이런 특급호텔과 강릉아산병원이 들어선 것은 오로지 그의 힘이다. 엘리베이터 문과 마주한 곳에 이 호텔의 구상을 담은 마이어의 스케치들이 전시되어 있다. 바다로 돌출한 언덕 위 입지를 잘 살렸다. 모든 객실이 선물처럼 바다를 향한다. 훌륭한 작업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서울의 호텔과 달리 주차 인심도 후하다. 별도의 통제가 없다. 별것 아니지만 신경 쓸 거리가 하나 준다. 홀가분하게 공간을 즐기면 된다.

이전 19화강릉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