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는 즐거움

by 박상하

남대천변에서 열리는 아침장이 근사하단다. 중앙시장이 바로 곁이니 아침 장에 없는 물건들은 그곳에서 살 수 있다. 어느 도시나 ‘중앙’이 들어간 시장은 그 도시에 있는 물건은 모두 모여 있게 마련이다. 다만 우리 식구 모두 아침잠이 많다는 것이 문제다. 갓 잠 깬 산뜻한 기분으로 인근 농수산물을 사올 수 있을 텐데, 우리는 한 번도 아침 장을 구경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럴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들은 여유롭자고 강릉에 내려왔는데 아침부터 열심을 내는 것은 적절한 처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은 집 바로 옆 농협 하나로마트와 집에서 하평들 너머 보이는 이마트로 보러 간다. 언제인가부터는 하평들을 건너는 일도 시큰둥해져 장보기는 대부분 농협에서 해결한다.


새로운 곳에서의 장보기는 즐겁다. 서울에서 평소 들리던 시장에서와는 다른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러니 영업자들이 밤낮 없이 전국을 누빌 수밖에. 이곳에 자사 물건을 넣은 영업자들은 타사 영업자들보다 유능한 것이 틀림없다. 입구에서 화사한 꽃과 화분 들이 우릴 맞는다. 이번에는 노란색이 화사한 프리지아다. 철마다 꽃이 바뀐다. 특급 호텔도 아닌 이런 곳에 생화라니. 이곳이 농협 가운데서도 원예농협에 소속된 지점이기에 누리는 호사다. 꽃 코너 너머에는 강릉 인근에서 재배된 채소와 과일 들이 자리 잡았다. 정동진에서 왔다는 유난히 껍질 색 짙은 계란과 사천에서 왔다는 울퉁불퉁한 감자가 놓였다. 가끔 살짝 멍든 사과를 비닐봉지 한가득 담아 헐값에 파는 횡재도 만난다. 이곳저곳 흠은 있지만 금방 딴 때문인지 오히려 더 향기롭고 싱싱했다. 뿌리에 흙이 붙은 대파 한 묶음도 서울의 반값이다. 알록달록한 파프리카도 가끔은 깜짝 놀랄 만치 값이 싸다. 우리 것 하나, 장모님 것 하나 두 봉지씩 바구니에 담는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빵집이 있다. 매일 이렇게 많은 빵을 구워 내다니, 감탄할 만큼 각종 빵이 수북하다. 인근 고정 거래처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부터는 커피도 팔기 시작했다. 앉을 자리도 몇 곳 있으니 장 보러 나온 동네 아주머니끼리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다. 사장님은 고단해 보이지만 늘 웃는 낯이다. 빵 봉지에 웃음까지 함께 담아준다. 애틋하고 감사하다. 우린 단팥빵과 완두앙금빵의 팬이다. 열댓 개씩 구입해서 몇 개는 냉동실에 넣어 얼려 둔다. 다음 번 방문했을 때 아침식사용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먹을 만큼 빵을 꺼내두면 밤새 해동되어 아침이면 넣기 전 상태가 된다. 느긋하게 커피를 내려 달콤한 빵과 함께 아침 삼으면 무척 행복하다.


‘대관령 콩나물’이라니! ‘해양심층수 두부’라니!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식품들이 몫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번 맛보자며 바구니에 담는다. 과자들도 서울 단골 마트와는 진열 방식이나 순서가 다르다. 눈에 잘 띄지 않던 ‘뽀빠이’가 앞으로 나와 있다. 이곳에서는 저런 근기 있는 과자가 인기일까.


야채 코너 안에 방수포로 덮인 좌대가 하나 생겼다. 감자철이 온 것이다. 감자가 빛을 보면 싹이 돋으니 이를 피하기 위해 두터운 방수포로 덮어 둔다. 곁에 놓인 집게로 집어 봉지에 가득 담는다. 100그램에 160원. 1,600원이면 맛있는 강원도 햇감자 1킬로그램을 살 수 있다. 평소 감자를 그리 반기지 않던 아이들이 이곳 감자는 맛있게 즐겨 먹는다. “강원도 감자래~요(강원도 사투리 억양으로)”


아들아이는 저만치서 아이스크림 냉동고 속을 들여다보며 심사숙고하고 있다. 이 많은 아이스바, 콘 가운데서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것이다. 이번 포트폴리오에 어떤 주식을 담을까 고심하는 투자자 못지않게 진지하다. 이번에는 ‘쌍쌍바’를 집어들었다. 먹을 때면 내가 둘로 나뉘는 음식이니 한쪽을 떼어 달라고 졸라도 못 들은 척 저만치 가버린다.


아내와 나는 잡화 코너 낯선 물건들에 한참이나 잡혀 있다. ‘유엔 성냥’을 발견했다. 오래전 기억과 달리 나무에서 플라스틱으로 포장재가 바뀌었지만 육각 곽이 여전히 매력적이다. 주변 친구들에게 뻐기며 나눠주려고 몇 개를 집어 담는다. 그런데 요즘 성냥을 어디에 써야 할까? 생일 축하 케이크에 꽂은 초를 불붙일 때?


알록달록 새가 그려진 양철 쟁반 앞에서도 서성인다. 서울에서는 레트로인데, 이곳에선 여전히 현역이다. 예쁘다. 그런데 이걸 어디에 쓰지? 크기별로 다 살까? 누구에게 선물로 줄까? 대단한 주제를 토론하듯 한참을 밀고 당기다가 서로 양보하고 아쉬운 대로 중간 크기를 하나 집어 든다.


이번에도 계획보다 많이 사고 말았다. 물건이 한가득 담긴 바구니를 끙끙대며 계산대 위로 옮긴다. 고객카드도 만들었다. 계산하고 내 전화번호를 불러주노라면 마치 정말 강릉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여성 계산원들은 당당한 태도로 능란하게 일한다. 친절하지만 과하지 않다. 말을 걸면 잘 받아준다. 잘 되는 가게들의 공통점이다. 서울 어느 대형 마트에서 넋이 나간 로봇처럼 일하는 계산원들을 만난 적이 있다. 피로에 절어 눈 아래가 시커멨다. 그들이 건네는 기계적 인사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내게는 묘한 모욕처럼 느껴졌다. 그들이라고 그렇게 일하고 싶을 리 없다. 그곳의 관리자들이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 장보기가 ‘일’에 더 가깝다면 강릉에서는 ‘놀이’에 더 가깝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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