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3. 4학년
정말 졸업을 앞두고, 졸업 전시를 준비하는 4학년 2학기가 되었다. 이쯤 되니 작업 실력과 함께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해도 커졌다. 이는 졸업 작품을 스스로 그려나가기 위해 꼭 정리해봐야 할 부분이었다. 작업에 있어서 나의 주의할 점은 이러했다.
나는 하고 싶은 주제가 생겼을 때 그 주제에 필요한 재료비, 시간, 과정, 노력 등을 걱정하다가 흐지부지 작업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타인의 혹평에 지나치게 귀를 기울이고, 그게 마치 나의 작업을 대표하는 평가인 것마냥 스스를 평가절하하는 면이 있다.
반면에 작업하는 스스로를 오랜 기간 관찰하며 눈여겨본 장점도 분명히 존재했다.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대체로 좋아한다.
나는 여러 가지 선택지 앞에 놓였을 때, 어디로 나아가야 할 지에 관한 전반적인 방향성을 파악하는 눈이 있다.
나는 자극을 받으면, 우울해하다가도 오히려 반대로 확 튀어버린다. 약간 스프링 같은데(?), 그게 의외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나는 심지가 굳세고 단단하여 쉽게 포기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결과를 낸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결과를 낸다'는 장점은 졸업 작품을 시작하기도 전에 나에게 묘한 힘을 주었다. 그리고 미대를 다니면서 여러 차례 크고 작은 고비들이 있었지만, 결국 4학년 2학기까지 도달했다는 것이 내가 쥐고 있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마지막 학기만큼은 내가 정말 그리고자 하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그리고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더 힘을 내어 도전해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번이 정말, 미대생으로서 마지막으로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자리니까, 내가 주도해서 졸업 작품을 그려내자.
졸업 작품은 정말 내 의지대로 해야 해.
졸업작품계획서
전공과목으로 '졸업작품계획'과 '졸업작품워크숍'을 수강했다. 두 수업은 모두 졸업 전시를 위해 4학년 2학기 학생들이 듣는 필수 과목으로, 각각 과목의 교수님이 달랐다. 즉, 어찌 보면 두 명의 왕을 모시는 한 명의 신하가 된 셈이다. 지난 학기에도 두 교수님을 모셨다가 각기 다른 평가를 듣고 좌절했던 경험이 있으니, 이번엔 신중해야 했다. 평가를 피할 수 없는 입장에서, 내 소신을 다할 수 있도록...
졸업 전시를 위해선 각 과목마다 졸업작품계획서를 내야 했다. 계획서는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으로 작성한다. 게다가 한 과목마다 100호씩 2개의 작품을 제출해야 하는 조건이 있는데, 100호 하나만 해도 높이가 성인 키와 얼추 비슷하다. 계획서를 작성하면서도 아득해졌다. '이걸 한 학기 내에 언제 다 그리지?' 내가 내 무덤을 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려야지.'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니까, 그리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미대를 가고 싶어 했던 내가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이젠 그리고자 하는 바가 있다.
캔버스 작업을 하는 동기, 선배들은 거의 다 복도로 나와 그림을 그렸다. 큰 캔버스를 엎었다가 뒤집었다가, 눕혀놓고 그리느라 허리가 다 아프다고 툴툴대면서도 빙그레 웃었다. 서로 어떤 작업을 하는지 궁금해져서 작업을 하다 말고 그림 그리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다. 12시가 넘은 시각, 사실은 어두운 학교 안에 남아있는 게 무서울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자리를 지키며 끝까지 그림을 그렸다. 바닥에 한기가 올라왔지만 신문지를 깔고 앉아 그림을 그렸다. 때로는 교수님의 피드백도 듣고, 잠을 못 자 너무 피곤해져서 그림 그리는 걸 쉬는 날도 있었지만 대개 나는 그림 앞에 있었다.
완결에 가까워질 때
작업이 완결에 가까워지면서 여러 감정들이 마음을 스쳐 지나간다.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 뿌듯하기도 하고, 덧칠하고 구성을 다시 고민하면서 완성을 늦추고 싶은 마음도 든다. 끝나간다는 게 실감이 나서 그럴까. 하지만 거대하게 자리 잡은 작업들 앞에 서며 나는 묘한 떨림을 느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의지로 그려나간 작업들. 구도, 크기, 색 하나까지 고심에 고심을 더해, 때로는 새롭게 뒤집기도 하면서 무수히 많은 모호한 상황들 속에 결정을 내려가며 작업을 완성시켜 나갔다. 졸업 작업의 완성이 다가왔지만, 동시에 미대 생활의 완결이 다가왔다. 그걸 어느 순간 나도 알게 되었다. 정말 4학년 2학기인 것이다. 탈도 많고, 때론 눈물도 많이 흘렸던 미대 생활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큼 커버린 내가 적어 내려간, 4학년 2학기 때의 일기를 다시 읽어보니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었다. 일기를 또 발췌해 왔다.
마지막 개강을 보내며, 묵묵히 내 삶을 견뎌나갔다. 졸업 작품을 만들고, 복수 전공한 과목의 졸업 시험을 준비하고.. 마음은 조급한데 그 무엇도 확실한 것이 없어 눈을 감고 달려가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래도 달려 나가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멈춰서 있어야만 할 테니. 내가 이번 학기를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작품을 만들고, 그 뒤의 미래도 잘 꾸려나갈 수 있을까. 그 무엇도 확신하지 못한 채 나아가고 있지만, 나를 믿어주는 수밖에. 내 가능성을 내가 지지해 주는 수밖에.
나를 믿어줘서 고마워.
나를 믿어준 사람이 나여서 참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