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Vancouver Public Library
어학연수 시절, 그리고 SJ와 갔었던 두 달의 시간 1년 2개월 남짓한 기간 중 내가 가장 많이 간 곳은 도서관, 밴쿠버 퍼블릭 라이브러리(VPL)이다.
어학연수생 시절에는 왠지 이 곳에 오래 있으면 그래도 영어가 조금 늘지 않을까 생각해서 시간을 뭉개고 있던 곳이었다. 한국 친구들과 가서 숙제를 하면서 노닥이다가 온 적도 있었고, 도서관 앞의 그 의자가 있는 곳에서 튜터와 튜터링을 한 적도 있었다. 여기 있으면 조금이나마 죄책감이 덜 느껴져서 오는 곳이었다.
도서관에 있기는 했지만 영어 서적은 많이 읽지 않았다. 영어 실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섣불리 책을 손대지 못하고 학원 숙제만 하고 가고 그랬었다. 어쩌면 반대로 하는 게 맞았던 거 같다. 책에 손이 안 가도 도서관에 쉬운 책부터 읽어나가고 학원 숙제는 집에서 하던지 나중에 자기 전에 하던지 했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때는 전혀 몰랐고, SJ랑 같이 오고 나서도 나중에 알았는데 밴쿠버 도서관에는 ESL 학원을 위한 섹션이 따로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을 더 올라간 Level 4에 도착하면 바로 정면에 ESL이라고 써져있는 몇 개의 책장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 섹션에는 Grammar, Pronouncation, Reading, Writing 등 영어 공부와 관련된 여러 서적이 구비되어 있다. IELTS나 TOEFL 같은 시험 준비 교재도 많이 꽂혀 있는 걸 알 수 있다. 아쉽게도 TOEIC 관련 서적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소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TOEIC이라는 시험으로 영어 실력을 구별할 수 있다고 보기도 어려우니 굳이 관련 책을 놔두진 않았을 거 같다.
이 ESL 책들이 어떤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고, 어떤 자료들을 활용할 수 있는지 밴쿠버 도서관은 ESL 투어도 제공하고 있다. 나도 참석을 했었는데 밴쿠버 도서관 카드를 만든 사람이라면 참고할 사항이 많은 듯했다. 어학 교재를 빌리는 신청 방법이라든지, 얼마 동안 몇 권의 책을 빌릴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고, 어떤 자료들이 중급이고, 어떤 자료들이 초급인지 친절히 알려주신다.
영어 실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굳이 이 투어를 참석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대부분의 서적이 초/중급 레벨의 어학연수생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괜찮아 보였던 것 중 하나는 영어 고전 오디오북이 리딩교재로 깔려있었다. 오디오북 CD를 들으면서 책을 눈으로 같이 읽어나가는 건 좋은 학습법이 된다.
왜냐면 어렵지 않은 수준의 고전들은 문장이 깔끔해서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배울 점이 많고, CD에서 들려 나오는 전문 성우의 녹음을 통해서 문장 간 숨 쉬는 곳, 억양, 정확한 발음까지 배울 수 있다. 특히 문장 간 성우들이 숨 쉬는 곳이 어디인지를 잘 참조하면 좋다. 왜냐면 그 숨 쉬는 순간들이 영어 원어민 사용자들의 thinking chunk라고 생각하면 문장을 만들 때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원어민들은 이런 방식으로 생각을 만들고, 그 생각이 이 문법으로 전환돼서 나오는 구나라는 걸 잘 기억하면서 읽다 보면 자연스레 해당 언어 사용자들처럼 생각하는 방법과 친숙해진다. 그들처럼 백 퍼센트 생각하는 건 쉽지 않지만.
밴쿠버 도서관은 다양한 사람들이 이용한다. 공부를 하러 오는 학생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엄마들, 갈 곳 없는 홈리스들도 많이 온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공시설이니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올 수밖에 없다. 영어 공부를 하는 어학연수생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하나의 tip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밴쿠버에 온 한국 지인 분이 있었다. 이 분은 영어 공부에 관한 열정이 커서 튜터링도 열심히 하고 여기저기 네트워킹도 많이 하시는 분이었는데 밴쿠버 도서관 앞에서 나이 드신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나셨다. 그 할아버지는 은퇴하시고 도서관에 소일거리 하러 자주 오시는대 이런 분들은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신다고 지인분이 얘기해줬다.
우리나라 사람들은-개인적인 의견- 타인과 대화하는 걸 그리 즐기지 않지만 영어 문화권 사람들은 본인의 신상정보를 얘기하지 않고도 신기할 정도로 타인과의 대화를 잘 해나간다. 대화의 기술이 더 좋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이 분은 도서관 앞에서 만난 그 할아버지와 도서관이 10시에 문 열기 전까지 30~40분간 커피를 마시면서 늘 이야기를 하셨다. 튜터링을 하면 돈을 내야 하는데 이 분은 커피 한 잔 사드리면서 편안하게 40분에서 1시간가량 대화를 하시면서 유대감도 쌓으시고 식사도 하러 가고 즉 말 그대로 친구를 만드셨다. 지인 분도 그 할아버지 분에게 다가가 말 걸기 쉽지 않았는데 용기를 낸 덕분에 좋은 친구를 만들 수 있었다며 좋아하셨는데, 현지에서 대학교나 대학원을 다니지 않는 한 현지인 친구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대단하신 거 같다.
많은 어학연수생들이 밴쿠버 도서관에 처음에는 자주 간다.
그리고 도서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곧 발길을 끊어 버린다. 사실 SJ도 도서관 가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어학원 일반 ESL 코스 숙제가 2시간, 3시간 걸릴 숙제는 아니니 1시간가량 숙제를 하고 나면 어디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딱히 어디 갈만한 데가 정해진 건 아니었지만 도서관에 앉아있으면 졸린지 나가고 싶어 했다. 그럴 때면 SJ를 한국 서적이 있는 2층으로 데려갔다. SJ가 영어 공부하러 오긴 했지만 계속 영어 공부만 하다 보면 흥미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사실 나도 자주 내려가고는 했었다. 영어가 내 마음대로 느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스트레스받을 필요는 없어서 기분 전환하러 내려가서 한 시간 정도 머리를 식히면 다시 공부할 수 있었다.
밴쿠버 도서관에 그냥 숙제만 하러 간다면 질려서 그 안에 숨겨진 좋은 것들을 놓칠 수 있다. 도서관이 진행하는 다양한 이벤트(Job Search, Writing Proofreading 등), ESL 섹션에 있는 좋은 자료, 머리를 식힐 수 있는 2층의 한국 서적 섹션이나 입구에서 왼쪽으로 가면 영어 코믹스 섹션, 그리고 조용히 SJ와 이야기도 하고 같이 숙제도 할 수 있었던 collaborative zone 등 이 모든 것들을 밴쿠버에 머무는 동안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