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족주의와 민주주의의 위기 #2

by 채과장

Source: Foreign Affairs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와 영국에 브렉시트가 선거에서 통과된 이유 등을 이 글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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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경제학자는 인간은 재화에 대학 욕망에 의해 동기부여 된다고 가정합니다. 이러한 인간 행동에 대한 개념은 서방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현대 사회과학의 근간을 이룹니다. 하지만 이 개념은 고대 철학자들이 깨달았던 중요한 걸 놓치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갈망이이죠.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갈망이 인간 정신의 세번째 부분을 형성한다고 믿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욕망하는 부분, 또 다른 하나는 계산하는 부분입니다. 플라톤의 저서에서 그는 이것을 thymos 라고 규정했으며 영어로 번역하자면 정신과 그나마 비슷하다 할 수 있습니다.


정치에서 thymos는 두 가지 형태로 표출됩니다. 먼저 상대방보다 우월하다고 인정받는 욕구 입니다. 민주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계급이라는 것으로 잘 나타납니다. 귀족이라는 집단은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걸 타고났다라는 믿음이 있었고, 사회 질서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이 욕구의 문제점은 우월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을 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인간 이하의 존재로 치부되고 열등한 존재로 인식되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가 불공평하게 대우받을때 강한 분노가 발생하게 되며,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게 인식받고자 하는 강한 감정이 발생합니다.


민주주의의 발생은 이 감정의 승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0세기에 민주주의 사회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하기 시작하고 식민지배를 받던 국가들은 독립을 쟁취합니다.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큰 투쟁이었던 인종차별 주의, 노동자의 권리, 여성의 법적인 동등 지위 요청은 인간을 하나의 완전한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일어났습니다.


허나 민주주의에서 법적인 평등이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고, 시장 경제는 부의 불평등을 가져왔습니다. 30년동안 미국과 선진국에서 부의 불평등은 지속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사회 구성원의 상당수는 정체된 소득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고, 특정 집단은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 상황에 대한 위협이 바로 미국과 다른 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포퓰리즘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으로 정의되는 미국의 근로자 층은 최근 몇 십년간 힘들게 지내고 있습니다. 일자리 감소, 소득 정체와 같은 경제적 현상 뿐 아니라 사회의 분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흑인들의 경우 육가공, 자동차 제조 등 일자리가 있었던 시카고, 디트로이트, 뉴욕 등으로 이주를 했지만 1970년대부터 근로자 계층은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제조업의 쇠락과 탈산업화로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어가기 시작하고, 범죄율은 상승, 마약의 범람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가난도 세습되기 시작했죠.


십년간 유사한 현상들이 백인 근로자 계층에도 퍼져나갔습니다. 마약의 범람은 백인 근로자 계층이 있는 곳을 공동화 시켰습니다. 2016년 미국에서 약물 과다복용으로 6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 수치는 교통사고 사망자 수의 2배에 이릅니다.


백인 남자의 기대 수명은 2013년~2014년간 하락 했는데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백인 근로자 계층의 자녀가 편부모 밑에서 자라날 확률은 2000년 22 퍼센트에서 17년 36 퍼센트로 상승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가 백악관 안으로 입성할 수 있었던 신국가주의의 주요 동인은 무시받고 있다라는 걸 사람들이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중산층의 위기를 겪고 있는 근로자 계층의 시민들은 그 동안 자신들을 무시했던 엘리트층에 분노하기 시작했고, 자신보다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것으로 보이는 극빈층에게도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진 게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군가인지를 모를 때 경제적 어려움은 인식됩니다. 열심히 일한 사람은 한 개인으로 존중 받아야 하는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많은 백인 근로자 계층은 열심히 일했지만 개인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걸 제공하는 것처럼 근로자들은 느끼고 있습니다.


소득과 사회적 지위의 연결점이 왜 국수주의자 또는 보수적인 종교적인 간청이 진보 진영보다 왜 더 효과적인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국수주의자들은 근로자 계층에게 당신들은 이 위대한 국가의 핵심이었다. 외국인, 이민자, 엘리트들이 당신들을 이렇게 만들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나라는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나라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이민자들이 왜 여러 나라에서 논쟁을 가져오는 지 알 수 있습니다. 무역처럼 이민은 GDP를 상승시키지만 모든 사회 구성원이 혜택을 받지는 않습니다. 거의 언제나 주류 민족은 외국인들이 국경을 넘어서 들어오는 것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민자에 대한 분노만으로는 과거 진보 진영 편이었던 유권자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이유는 진보 진영이 글로벌라이제이션과 급격한 기술 변화로 중산층의 지위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말하는 걸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과거 진보진영은 자본가들의 착취를 문제점 삼으면서 근로자들이여 뭉치자 라고 호소했습니다. 1930년 뉴딜 시대부터 레이건 대통령이 당선되었던 1980년대까지 미국의 근로자들은 진보 진영을 옹호해 왓습니다. 또한 유럽의 사민주의 역시 노조와 근로자 계층의 지원하게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에 진보 진영은 전략을 바꿨습니다. 근로자 계층이나 경제적 취약층 같은 대형 집단보다 더 작은 집단에 촛점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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