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의 전개쯤
#어디로 갈까
SJ는 영미권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보고 싶다고 했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 좋은 자리에 지원하지 못 했었기 때문에 두 달 동안 영어가 확 늘지 않아도 영어를 많이 접해봐서 자신감을 가지면 좋을 것 같다 했다. 영미권 하면 난 떠오르는 나라가 두 개 밖에 없다. 미국과 캐나다. 한 곳은 내가 대학원을 다녔던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어학연수를 갔던 곳이다.
두 나라 중에서 내가 더 좋아하는 곳은 캐나다이고 캐나다에서도 밴쿠버였다. 매년 살기 좋은 도시에 시드니와 함께 자주 뽑힐 정도로 공기도 좋고, 아름답고, 그리고 20대 초중반에 가서 그런지 나의 상큼(?)했고 치기어린 고민이 있던 곳이라 마냥 좋았다.
반면 미국에서 대학원 때 머물러 있던 곳은 너무 치열하게 살았던지 아니면 추워서 그러는지 몰라도 전화하면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더 많이 있어도 SJ와 같이 가고 싶지 않았다. 사실 비용도 더 비싸지만 가봤자 그리 할 것도 많지 않고 뭔가 어학연수라면 어학연수에 맞는 도시를 가야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시기가 문제였다. 5월에서 9월까지는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로 좋은 날씨였지만 10월에 비가 오는 우기로 접어들면 그렇게 우울한 도시도 없었다. 4시 반 정도면 해가 다 지고, 수업이 끝난 어학연수생들은 한국 사람들끼리 우루루 몰려 스타벅스에서 잡담 하던지 아니면 공립도서관에 가서 공부만 했었다.
수업끝난 복학생들이 중앙 도서관에 가서 공부 하듯이. 공부를 하는게 나쁠 건 하나 없지만 외국에 나갔을 때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게 개인적으로는 최고라고 생각해서 할 게 없어지면 아쉬운 점이 클 거 같았다. 그러면 어디로 갈까? 시드니? 날씨로만 따지자면 하반기에 가기엔 최적의 도시 같았다. 날씨도 좋았고 밴쿠버 못지 않은 살기 좋은 도시. 그래도 난 선뜻 SJ에 시드니로 가자고 하지 못했다. 사람에게 애착이 있기는 있나보다. 시기만 잘 잡으면 밴쿠버도 나쁠 거 같지는 않았다.
#난 뭐하지?
그래서 9월에 우리는 밴쿠버로 가기로 했다. SJ는 두 달간의 어학원에서 수업을 받고 나는 뭐할 지 아직 정하지 못 했다. 뭘 해야할까.
처음에 생각한 거 밴쿠버에 있는 회사 특히 사람 손이 부족한 스타트업에 무급 인턴을 해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스타트업 이라는 곳이 궁금하기도 했고, 혹시 모르니 일에 대한 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두 군데 정도 레쥬메를 제출해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노’였다. 역시 워크 퍼밋(work permit)때문인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면 뭘해야하지 싶어 고민해보니 자원봉사활동을 해볼까 싶어 구글에서 검색을 해봤다. 이런저런 아니 많은 포지션이 떴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내가 해보고 싶은 건 눈에 띄지 않았다. 대학원때는 자원봉사 활동이라도 프로젝트 성격으로 참여해볼 수 있는게 많았는데 검색된 건 정원 관리 같은 손재주가 필요한 포지션이었다. 사무지원 포지션이라도 찾으면 써볼까 하는데 손재주가 필요한 자원봉사 활동은 가서 내가 뭔가 더 폐를 끼칠 거 같아 쉽게 지원하지 못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냥 진짜 한량처럼 놀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도서관 가서 글쓰고 책읽고, MOOC에서 듣고싶은 강의 들으면서 그냥 놀까? 그래도 되나? ‘두 달 동안 이렇게 말미를 얻은 건 한국에 돌아왔을때 내가 뭐할지는 머릿 속에서 정리를 끝내야 하지는 않나?’ 라는 생각에 지금 매몰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혼자서 도서관에서 컴퓨터만 들여보다가 SJ가 학원 끝나고 둘이서만 있다가 두 달 뒤에 돌아오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뭘 해야하지? 라고 되물어보며 프로젝트를 찾아보고 있다. 혼자서 해볼 수 있는 프로젝트. 그래 글을 쓰자. 단편이나 중편소설을 써보자. 자원봉사라도 무조건 해보자. 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나도 가서 소통을 하는 거다. 그것도 아니면 무작정 스타트업 회사로 찾아가서 이력서를 내보고 찔러보자. 그것도 아님 웹사이트 만드는 거라도 혼자 해보고 오자. 등등 끊임없는 생각들이 머릿 속에 맴돌고 있다.
#가기 전에 할 건 많다
가서 뭘 할지 정한 건 하나도 없지만 가기 전에 해야하는 일 만으로도 시간이 흘쩍 지나가 버렸다. 두 달 동안 지낼 숙소 정하는 것부터 큰 일이었다. 홈스테이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두 명의 자유를 오롯이 만끽하고 싶어 에어 비앤비를 미친듯이 검색했고, 장기 레지던스 숙소에도 계속 전화하고 이메일을 보냈었다.
결국 두 달의 기간을 만족시키지는 못 해서 한 달은 에어비앤비로 머물고, 다른 한 달은 장기 레지던스 호텔에 머물기로 했다. 사실 SJ와 나는 SJ의 학원이 있는 레지던스 호텔에 머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한 달에 만족해야만 했다.
장기 레지던스 호텔 신청할 때는 예전 대학원 지원 생각이 났었다. Application 비용도 있었고, 지원 동기라기 보다는 이 숙소를 신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서술해야 하는 질문도 있어서, 심지어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만 신청이 완료되었다. 장기 레지던스 호텔이 이렇게 인기인가 싶었다.
에어비앤비는 그 동안 단 한 번도 이용해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장기로 한 달동안 머물기로 하다니 걱정이 앞섰다. 사기는 아니겠지? 사진만 보고 결정했는데 사진이랑 다르면 어떡하지? 갔는데 주방이나 냉장고를 못 쓰게 하면 어떡하지? 등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래도 글쓸 거리는 생겨서 다행이네 라는 말도 안되는 생각만 들었다.
숙소가 정해지고 나니 큰 일 덩어리 하나가 사라졌다. 그 외 가장 큰 일은 양가 가족들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하나 라는 숙제였다. 결국 나는 집에 사실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대로 말해봤자 이해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이래나 저래나 뻥치는 거 좋은 쪽으로 뻥치자 라는 생각이 들어서 해외 TF에 선발되서 장기로 파견나가는 스토리를 만들었다.
숙소도 내 회사에서 지원해주니 SJ는 쌓인 연차를 다 쓰면서 너랑 같이 있는 걸로. 스토리를 지어내고 보니 나름 진짜 같고 설득력 있었다. 스스로도 설득될 거 같은.. 실제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여하튼 이 스토리가 우리 부모님에게 잘 먹혀서 무탈하게 그 자리를 넘기고 캐나다로 잘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 진짜 새로운 시작이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