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의 발단
SJ가 술을 먹고 싶다고 전화했다. 그 전화를 받은 순간 하나를 직감했다. 승진발표였다.
SJ는 올해가 승진하는 시기였는데 농담처럼 승진이 안 되면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었다. 후배들 볼 면목도 없고 남자들만 승진시켜주는 회사가 싫어서 못 다닐 거다라고 농담처럼 말했었다. 저렇게 말할 수 있었던 건 승진 가능성이 80%정도 되었기 때문이었는데, 20%의 가능성이 현실로 일어나버렸다.
같은 팀에 있는 남자 과장이 또 특진을 한 것이다. SJ가 딴 회사에서 온 경력직이라고 해도 이번에는 SJ가 승진하는 게 맞았다. 왜냐면 그 과장은 지난해에도 특진을 했기 때문에 또 특진할 줄 몰랐고, 팀장도 SJ를 밀어주기로 해서 이번엔 승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팀장 위의 라인이 남자들을 키워야 한다고 또 남자들이 대거 특진해버렸다.
한국의 회사에 유리천장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임원이나 팀장으로 승진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과장가지고도 이렇게 유리천장을 만드는 것에 놀랬다. SJ 말처럼 자기 회사 일은 전문성을 갖춘 게 아니기 때문에 윗사람들이 누굴 좋아하느냐에 따라 인사발령이 나서 너무 싫다고 했었다.
소장이 남자들끼리만 모아서 캠핑을 간다는데 그 캠핑에서 남자들끼리 으쌰으쌰 하고 자기네들이 어떻게 해먹겠다 분명이 얘기할 것이라고 분한 목소리로 SJ가 자주 얘기했었다. 그래도 승진은 공평히 하겠지 라고 대꾸했던 내가 살짝 부끄러웠다. 정말 그렇게 많이 하는 구나….
퇴근하고 어깨가 축 쳐진 SJ를 데리고 상수역에 있는 간장새우집을 들어갔다. 예전 마포에 살 때 지나가면서 한 번은 가보자고 했던 곳인데 축 쳐져서 들어갈 줄은 몰랐다. SJ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얘기했다. 너무 분하고 회사가 꼴보기 싫어서 다니지 않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알겠다고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 먼저 회사를 나왔는데 무슨 자격으로 내가 너의 퇴사를 반대하겠는가 생각에 그래 그만두고 다른 걸 찾아보자고 했다. 우리 부부가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세대출금 월 이자 나가는 것 외에는 큰 대출도 없고 다행히 양가를 도와드려야 하는 상황도 아니니 여유를 가져보자라고 생각했다.
대학교 중간에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첫번째 회사를 나와서 10개월 동안 대학원 준비를 하며 백수생활이나, 이직한다고 한 달 정도 쉬는 시간이 있었던 나와는 달리 SJ는 한 번의 공백도 없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게으른 성격이라 미친듯이 바쁜 시기를 보내고 나면 꼭 핑계나 상황을 만들어서 알아서 쉬는 시간을 찾았다. 반면 SJ는 십 몇년을 정말 쉼없이 달려왔던 거 같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으니 20대 초반에 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일을 시작해서 30대 중반이 될 때까지 자기에게 여유를 줘본 적이 없는, 내 관점에서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달려왔는데도, 회사에서 관리자 자리 하나 안 주니 SJ는 속이 많이 상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 SJ에게 내가 말했다.
“우리 단기 어학연수라도 갈까?”
SJ는 영미권 어학연수를 준비하고 있었다가 집안 사정으로 못간 것이 두고두고 한이라고 예전부터 말했다. 그래서 신혼여행도 영미권인 하와이로 갔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둘 다 쉬는 상황이라면 짧게 갔다오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았다.
1년을 가는 것도 아니고, 6개월을 가는 것도 아니고 두 달 정도만 가면 경제적으로도 큰 무리 없을 거 같았고, SJ가 외국에 나가서 마음의 여유를 좀 찾고 다른 삶의 속도들을 관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SJ의 눈이 반짝였다. 좋다는 신호다. 정말 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가도 괜찮냐고 나에게 물어봤다. ‘그래 가자’ 가 나의 대답이었다. 결혼하고 뭔가 딱히 곰살맞게 잘해준 거 같지 않았고, 회사 다니며 너무 힘들어하는 내가 SJ에게 기대기만 해서 미안했던 터라 SJ가 꼭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가자고 대답했다. 이런 대답을 하는 날 보며 SJ는 내가 특이하다고 했다.
보통 이럴땐 너마저 그만두면 어떡하냐며 싸우는 게 아니냐고. 난 SJ랑 싸우는 걸 싫어한다. 싸우면 SJ가 잠을 재우지 않는다. 나는 정해진 시간대에 잠을 자야 그 다음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데 싸우면 새벽까지 깨있어서 다음날 아무 것도 못한다. 결국 화해하고 말 걸 굳이 싸울 필요가 있나 싶어 가급적 안 싸우는게 맞고 싸움의 이유도 보통 나에게 있기 때문에 안 싸우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이번 경우도 결국 내가 퇴사를 먼저 한 건데 나는 퇴사를 하고 너는 퇴사를 하지 마라는 건 초등학생도 수긍을 못하는 논리이니 굳이 왜 반대를 하겠는가. 같이 그만두고 잠깐 어디 갔다오자라고 우리는 그 날 결론을 내리고 택시타고 경인고속도로를 달렸다.
택시에서 SJ가 물어봤다. “그럼 어디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