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혁, 일곱 번째 이야기
살아가면서 찍는 점들이 언젠가 모여 별자리로 이어지는 날이 온다는 걸 믿다 보니 나는 나만의 점을 찍고 그는 그만의 점을 찍으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하늘 아래 같은 별자리가 하나도 없듯이.
멕시코에서 다른 인생을 살기 시작하기 전 군대를 갓 전역한 스물세 살. 호주에 가고 싶었다. 대학 복학이 싫었던 걸까 혹은 남 눈치나 보며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성향이 강했던 걸까. 해외로 나가면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할 것이고 외국에 살기라도 한다면 언어라도 늘지 않겠나 생각했다. 해외여행 한번 안 가본 꼬맹이가 세상 구경 한 번 하고 싶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호주로 가기 전 필리핀 어학연수를 가야겠다며 돈을 모으기 시작하지만 목표 없는 꿈에 갈피를 잃었는지 그렇게 일 년을 방황한다. 그러고는 자퇴를 하려던 대학을 졸업하더니 멕시코로 출장을 다니시던 외삼촌의 조언 덕에 영어 문법도 잘 모르는 내가 스페인어 사용 국가인 멕시코에 발을 들이게 된다.
치안이 좋지 않다며 걱정하던 주변 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넘어간 멕시코 생활은 생각 이상으로 가혹했다. 거리에 나가는 게 무서워 흔한 세제 하나 사지 못해 세수 비누를 녹여 빨래를 하는 일도, 세탁기 전원이 꺼졌지만 말이 안 통하니 5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경비 아저씨 팔을 붙잡아 세탁실로 끌고 오는 일도 멕시코에선 흔한 일이었다.
금방 취업할 거라 자만한 만큼이나 취업 문턱은 높았다. 약 8개월가량 스페인어를 공부하며 홀로 지내니 이제는 외로움마저 느낀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했던가 호주 워킹홀리데이 간답시고 모아둔 생활비마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불안과 우울감마저 동반하는 게 이거 영 쉽지 않다.
멕시코에 오게 된 지 9개월. 운 좋게(?) 전기과를 졸업했다는 이유만으로 별 볼일 없는 이력서를 봐주는 회사가 생겨 면접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마저도 스페인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탈락의 고배를 한 번 마시고는 잇달아 연락 온 두 번째 회사에 합격하여 취업을 하게 된다.
모든 사회 초년생이 그렇듯 나 또한 취업만 하면 세상이 다 잘 풀릴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하루 종일 홀로 집에 있는 것보다 낫진 않겠냐던 생각은 오래 지나지 않아 출근길에 크게 다치지 않는 사고라도 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그도 그럴게 공장 기술 용어를 베이스로 하루 2시간이 넘는 회의를 주관해서 스페인어 통역을 하라니. 이제 막 의사 표현이나 할 줄 아는 나를 답답해하시는 팀장님의 따가운 눈총을 견디기 어려웠다.
입사한 지 한 달이 지난다. 하루는 현장 업무를 보고 흡연장을 지나가는데 대체자를 구하자는 팀장님의 말씀을 우연히 듣게 된다. 업무가 급한데 통역도 제대로 되지 않으니 새로운 사람을 뽑자는 모양이었다. 그날은 유독 업무가 손에 잘 안 잡힌다. 그럼에도 두 시간 통역은 어김없이 진행됐다.
업무를 마치고 집에 와 이불을 덮어쓰고는 어둠 속에 숨는다. 혹여나 걸어온 길을 되돌아갈 수 있을까 뒤를 돌아보지만 시야가 흐릿하니 보이는 게 없다. 이렇게 상심하고 있어 봐야 소용없다는 말이기도, 이제와 도망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겠다.
살아남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바쁜 회사 사정에 밤 열 시까지 퇴근이 늦더라도 집에 와 그날 팀장님이 회의 중 하신 말씀을 전부 한국어로 적어둔 삐뚤삐뚤한 종이 몇 장을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일은 미루지 않는다. 쪽잠을 자고는 출근해서 팀 현지 직원에게 슬쩍 다가가 늦게까지 정리한 문장들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느냐고 묻는다. 그는 고맙게도 빨간색 펜을 꺼내 이렇게 쓰는 게 더 낫다며 문장을 고쳐준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고마움은 지속됐다.
괜찮은 대체자가 금방 구해지진 않는지 혹은 조금 더 지켜보려는 건지 기약 없는 시한부 회사 생활이 계속된다. 곧 수습 기간 끝날 때가 됐는데 아직까진 직접적으로 별 말이 없다. 이대로 쭉 없으면 좋으련만.
다시 한 달이 지난다. 삼 개월 수습 기간은 끝이 났는데 나는 아직 회사에 있다. 여전히 통역을 하며 여전히 출근할 때 작게나마 사고가 나길 바란다. 늦은 야근, 따가운 눈총, 힘든 회사 사정은 여전하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두 시간 회의가 한 시간 반으로 줄었다는 점.
회의 1시간 전 미리 팀 매니저와 직원들을 찾아가 회의 때 무슨 대화를 나눌지 물어보고 적어두는 습관이 생겼다. 어김없이 회의가 있는 그날도 미리 직원들을 모아 두고 회의 내용에 대해 물어보는데 그날은 유독 미리 적어 두고 찾아볼 게 없었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그날은 스페인어가 잘 들리고 말도 잘 나왔다. 회의도 평소보다 일찍 마친 특이한 날이었다.
특이한 일이 특이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닫게 된다. 점점 회의 준비 시간이 짧아지고 이제는 그들의 말이 또박또박 들리기 시작하더니 막힘 없이 말까지 한다. 특이한 날 혹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삼 개월 간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생각했는데 가장 중요한 게 변해있었다.
그렇게 멕시코에 온 지 3년이 지난다. 이제는 2시간이 넘는 회의를 무리 없이 진행하며 오랜만에 만난 현지인 친구와 하루 반나절을 웃으며 대화한다. 기관 선정으로 해외 취업 영상도 찍게 된다. 영상의 이름은 해외 취업 성공기란다. 이어서 멕시코 취업 공식 멘토가 되고는 대학 취업 강연의 연사자로 초청받는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되며 모호했던 가치관이 확고해져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앞 날을 기대하는 삶을 살게 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스스로가 컨트롤할 수 없는 수많은 예기치 못한 상황을 겪곤 한다. 또 그것들에 의해 생각지도 못한 결과물들이 나타나는 걸 보며 그냥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 내 앞에 기회가 나타나게 되어있고 그때 그 기회를 잡으면 된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모든 것에는 순서가 있고 사람은 자기가 그리는 대로 살게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계속 머릿속에서 방향만 놓지 않고 있으면 결국 돌아 돌아서라도 비슷한 인생을 살게 되더라.
Connecting the do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