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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현 Feb 11. 2018

눈빛과 걸음의 미학

<알베르토 자코메티 전> 전시 리뷰 

자코메티, <디에고의 흉상>


 "그가 널 조각한다면, 그는 너의 머리를 칼날처럼 만들어 버릴 거야." 자코메티의 한 친구는 우스갯소리로 그의 작업 방식을 이렇게 말했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자코메티 전시를 가니, 칼날처럼 얇은 그의 조각상들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서 있었다. 근육과 살점들은 뜯겨 나간 채 앙상한 뼈만 남아 있는 조각상들이 전시장을 채웠지만, 막상 작품 앞에 서자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쉽게 작품 앞을 떠나지 못하고 조각상의 얼굴을 한참 바라봤다. 날 사로잡은 것은 바로 조각의 눈이었다. 움푹 들어간 눈두덩이와 깊이 파인 주름들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선이 거기에 있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 어딘가에 정말 살아있는 사람처럼. 


 미켈란젤로부터 로댕까지 전통적인 유명 조각 작품들은 강하고 아름다운 인체를 그려내는 데 천착했다. <라오콘 군상>처럼 뱀에 감겨 죽어가는 그 고통을 표현한 순간도 마찬가지다. 자코메티는 조각의 이런 일반적인 문법을 거부했다. 깎고, 없애고, 조각상이 지탱할 수 있을까 싶은 수준까지 또 깎는다. 시간 순으로 전시된 작품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러한 경향이 뚜렷이 보인다. 그는 끊임없이 인체를 더 약하게 만든다. 그의 작업 방식은 이전의 관점에서 보면 반(反) 미학적일 정도다. 모든 껍데기를 벗고 홀로 서 있는, 그렇게 최소한의 인간을 마주하는 경험은 고등학생 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을 읽었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우주의 거대함에 대해 처음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우주 속에서 인간은 티끌만큼도 안 된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 두려움, 허망함 그리고 무한한 고독감에 몸서리치던 밤. 


작자 미상, <라오콘 군상>, 바티칸 미술관, 2017


 많은 사람들이 자코메티의 조각상에 열광했던 이유는 2차 세계대전 후라는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진보를 순진하게 믿었던 벨 에포크(Belle Epoque)의 시대는 저물고, 죽음, 상실 그리고 절망만이 가득했던 시대. 자코메티의 조각상은 어쩌면 전쟁 후에 놓인 인간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인간, 하지만 세상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 자코메티의 조각상엔 과거 조각가들이 많이 사용하던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같은 자세 기법도 없다. 모든 조각들이 서 있든, 앉아 있든 정면만을 바라본다. 어떤 제스처도, 어떤 표정도 없이. 하지만 자코메티가 이야기했듯 시선은 '결국 죽음과 개인을 구별해주는 것'이다. 남은 건 시선뿐이지만, 그래서 우리는 아직 여기 존재한다. 


 여행을 좋아하던 한 친구는 떠날 때마다 이렇게 말하곤 했다. "눈빛 좀 맑아져서 돌아올게." 눈은 그대론데 눈빛은 바뀐다. 어렸을 때부터 눈빛이 남다른 사람들도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의 눈빛, 시선에 그 사람의 실존(實存)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실존주의를 이해하긴 어렵지만, 눈빛이 실제 존재한다는 말엔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자코메티 조각상에 아름다운 인체는 없다. 하지만 눈빛이 있다. 그것이 관람객의 발길을 붙든다. 그래서일까. 사르트르는 자코메티의 작품이 "실존주의적 실체를 담은 예술"이라 평하며, 자코메티의 전시 서문을 2번이나 썼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자코메티는 작품 활동 후반기였던 1958년에  <걸어가는 사람>을 만든다. 당시 건설 중이던 뉴욕 Chase Manhattan 빌딩 앞에 세워 달라는 요청을 받고서 였다. 향후 이 작품은 2010년 미술 작품 최고 경매가에 낙찰된다. 자코메티의 많은 조각상들 중에서도 이 작품이 가장 독보적으로 평가받는 건 이 작품에만 있는 특성 때문이다. 바로 '걷는다'는 것. 이 작품만 유일하게 '부동성'이 아닌 '이동성'이 담겨 있다. 전시장에 가보면 <걸어가는 사람>을 위한 별도의 방이 마련되어 있다. 조각상에만 비친 조명 외엔 모두 어둠이다. 홀로 선 그는 여전히 연약하다. 사위에는 캄캄한 어둠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둠 속으로 걸어간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언제까지 가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걸어간다.


 누군가는 자코메티의 작품이 이상하고, 기괴하고, 무섭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나약한 인간, 나약한 스스로를 마주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결핍, 부재, 고독, 이런 것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두렵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어딘가가 부족하더라도, 우리가 홀로 있더라도, 그래도 괜찮다고 자코메티는 이야기한다. 아직 우리에겐 눈빛이 있고, 걸을 수 있으니까. 


 덧붙여, 자코메티를 좋아했던 사르트르는 몸이 어렸을 적부터 약했고, 오른쪽 눈은 사시였다고 한다. 사시인 눈은 시력을 거의 상실했다. 하지만 그의 유명한 사진ㅡ파이프를 물고 있고, 사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ㅡ에서 느껴지는 건 오직 강인함 뿐이다. 자코메티의 조각상이 그렇듯이 말이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 2017


PS 1: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은 Chase Manhattan 에 설치되지 못했다. 자코메티는 이전까지 뉴욕에 가본 적이 없었는데, 전시 장소에 가본 후 프로젝트를 취소했다고 한다. 


PS 2 : 코바나 콘텐츠에서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았던 작가들을 매년 멋지게 기획하여 선보이고 있다. 마크 로스코(2015), 르 꼬르뷔지에(2016), 자코메티(2017)까지. 다음 전시가 또 기대된다. 


**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 전시 리뷰는 팟캐스트 <전시버스>에서 보다 상세히 들을 수 있습니다. 
 -팟캐스트 :  https://itunes.apple.com/kr/podcast/%EC%A0%84%EC%8B%9C%EB%B2%84%EC%8A%A4/id1214606194?mt=2&i=1000400356540

 - 팟빵 : http://m.podbbang.com/ch/13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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