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너머의 슬픈 사연
주홍색 연구 - 사건 너머의 슬픈 사연
아서 코난도일 / 코너스톤/이원종 서평
어린 시절 집집마다 책꽂이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세계명작들은 아마도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님들께서, 그 심리를 파고들며 설득하는 외판원에 의해 큰 맘 먹고 구입해 놓은 것일 텐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정작 아이들은 그 책들을 얼마나 읽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안타깝지만 우리나라의 독서인구와 독서량으로 미루어 볼 때 거의 장식용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그런데 그 때 만약 호기심에서라도 몇 권 뒤적거리다가 셜록홈즈 시리즈가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면, 책읽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는 절호의 계기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 작품 ‘주홍색 연구(A Study in Scarlet)’는 총 60편에 달하는 셜록홈즈 시리즈 중 첫 장편이다. 저자 코난 도일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왓슨(둘 다 직업이 의사였으며 여러 모로 공통점이 많다)이 홈즈를 처음 만나 같이 하숙하게 되는데, 이후 대부분의 작품들은 왓슨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비범하고 괴팍한 홈즈에 비해 늘 어설픈 추리로 헛다리를 짚는 왓슨 박사가 안쓰럽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진행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하고 친근한 인물이다.
작품은 1부 ‘왓슨 박사의 회고록 재판‘과 2부 ’성도들의 나라‘로 나뉜다. 1부는 두 번의 연쇄살인과 그 범인을 홈즈가 자신의 하숙집으로 유인하여 체포하는 과정까지를 기록한 이야기이고, 2부에서는 이 살인에 얽힌 사연이 전혀 다른 배경에서 전개된다. 먼저 왓슨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홈즈는 문학, 철학, 정치에 관한 지식이 전무하지만 화학과 해부학에 능통하며 특히 범죄 문헌 지식에 관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그 외에도 바이올린, 목검술, 권투, 펜싱 실력이 뛰어난 것을 보면 그의 직업인 사립 탐정과 관련 있는 여러 분야에서 집중력을 발휘하지만 관심이 없는 분야에는 전혀 에너지를 쏟지 않는 실리적인 성격이라 하겠다. 심지어 홈즈는 19세기인 당시에 태양계의 구조와 지동설도 몰랐다고 한다.
살인 사건의 첫 번째 피해자는 이녹 드레버라는 인물이며 독극물에 의해 사망했다. 묘사된 바에 따르면 좁은 이마와 돌출된 턱으로 인해 마치 원숭이처럼 보이기도 하는 무섭고 섬뜩한 얼굴을 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살인 용의자를 찾기 위해 영국 경찰국의 그레그슨 형사와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경쟁하듯 수사에 나서지만 소득은 없었고, 그런 와중에 예상치 못한 두 번째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피해자는 드레버의 비서였던 조지프 스탠거슨으로서, 레스트레이드 경감이 첫 번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하고 행방을 찾던 인물이었다. 심장 부위를 칼에 찔려 죽었으며, 현장에는 알약 두 개가 담긴 나무 약상자와 물 한 컵, 그리고 첫 번째 살인 때와 같은 '라헤RACHE'라는 글자가 피로 새겨져 있었다. 이는 독일어로 복수를 뜻한다.
홈즈의 남다른 관찰력과 논리적인 추리로 인해 결국 범인이 잡히고 만다. 그의 이름은 제퍼슨 호프였는데, 홈즈와 왓슨, 그레그슨, 러스트레이드 경감까지 네 명이 달려들어서 간신히 제압할 정도로 엄청난 완력의 소유자였다. 살인을 저질렀던 런던에서는 마부로 일하고 있었고, 피해자를 직접 태운 적도 있었다. 이제 모든 게 해결되었으니 궁금한 것은 뭐든 물어보라는 홈즈의 대사로 1부는 끝이 난다.
2부 시작의 배경은 거대한 북아메리카 대륙의 황량하고 메마른 사막지대이다. 1847년 5월 4일 한 중년의 남자는 그 곳에서 끝없는 소금 대평원을 바라보며 절망에 빠져있었다. 그는 엄마를 잃은 다섯 살 여자아이와 함께 물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존 페리어와 루시라는 이름의 두 생존자는 곧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로 했으나 잠시 후 극적으로 대규모의 이주민들에 의해 구조된다. 알고 보니 그들은 모르몬교도들로서 남자와 아이를 구조해서 데려가 주는 조건으로 자신들의 종교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존 페리어는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보호자가 필요했던 여자아이는 그 자리에서 바로 존 페리어의 양녀가 되었다.
모르몬교도 이주민들은 길고 험한 여정 끝에 유타 주에 정착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존 페리어 역시 특유의 성실함과 강한 체력으로 열심히 일하여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그의 딸 루시 페리어는 서부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유타의 꽃’이라 불리고 있었다. 어느 날 루시는 낙마의 위기에서 제퍼슨 호프라는 이름의 한 젊은 남자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버지 존 페리어 역시 이 건장한 젊은이의 품성이 마음에 들어 딸과의 결혼을 허락했는데, 문제는 서부로 향하던 이 젊은이는 모르몬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존 페리어는 겉으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모르몬교의 일부다처제를 역겨운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의붓딸만은 훗날 모르몬교도가 아닌 남자와 결혼을 시키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신랑감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모르몬교의 절대 권력자였던 브리검 영이 찾아와 장로 드레버와 스탠거슨의 아들 중 한 명을 선택하여 딸과 결혼하라고 명령하니, 부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 되어 결국 필사의 탈출을 계획한다.
마침내 부녀는 약혼자 호프의 도움에 힘입어 무시무시한 모르몬교도들의 포위망을 간신히 뚫고 탈출에 성공한 듯 보였으나, 호프가 사냥을 하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존 페리어는 총에 맞아 사망하고 딸 루시는 도로 끌려가서 드레버의 아들과 억지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루시 역시 한 달을 못 버티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페리어를 사살한 것은 스탠거슨이었으나, 드레버의 서열이 더 높아 그와 억지 결혼을 한 것인데, 주정뱅이 남편이었던 드레버는 페리어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했던 터라 루시의 죽음에도 별로 슬퍼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호프는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페리어의 뒤를 따라 영원히 잠들고 싶은 충동에 빠지기도 했지만,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오직 복수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다.
그 후 제퍼슨 호프는 몇 달 동안 산속에 숨어 짐승과 같은 생활을 하기도 하고, 유타를 떠나 유럽 각지로 도망다녔던 드레버와 스탠거슨의 뒤를 쫓기 위해 낯선 땅에서 막노동을 하는 등 온갖 고초를 겪으며 경비를 마련해야했다.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반복되었던 술래잡기 끝에 드디어 호프는 런던에서 그의 원수들을 따라잡았던 것이다. 이미 늙어버린 그 역시 대동맥 파열에 의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홈즈 일행에게 붙잡힌 바로 다음날 재판을 받기도 전에 그 역시 운명하고 말았다. 복수라는 일생의 목표를 성취한 그의 얼굴은 아주 평온했다고 한다.
우리는 셜록 홈즈의 날카로운 통찰에 늘 감탄을 하며 끊임없이 흥미를 느끼게 되는데, 여기서는 2부의 이야기가 그 개연성을 더해주어 마치 실제로 존재했던 사건과 인물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지금도 거대한 미국의 동서를 관통하는 80번 고속도로(Free way)를 타고 유타주의 솔트레이크 근처를 지나다 보면, 이 작품의 2부가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 눈처럼 뒤덮인 끝없는 소금사막과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바위산,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그 곳을 지나쳤을 수많은 사람들,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심정에 동조하게 되는 제퍼슨 호프의 슬픈 인생. 난생 처음 가본 미국이었음에도 그 황량함이 그리 낯설지 않았던 이유가 이 작품 덕분이었을까.
당신들은 나를 잔인한 살인자로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스스로를 여러분에게 버금가는 정의의 사도라고 여기고 있다오. (173쪽)
글쓴이 : 이원종
저자이자 독서경영 전문가로 활동 중인 이원종님은 중앙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이지리더 독서경영 연구소 대표와 오간지프로덕션 북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명지대, 한성대, 오비맥주,인천/안산 CEO아카데미 등 주요 기업체 특강 등을 통해 ‘책만이 살 길이다’, ‘독서경영을 바탕으로 한 성공의 길’ 등의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주)세계화전연구소 성공칼럼니스트, YES24 스타 블로거로 활동한 바 있으며 자기계발 분야의 전문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 easyreader@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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