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현대철학을 10년도 넘게 공부해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지금은 철학 가르치는 양반이었다.
“나이 오십이 넘어 올해 쉰넷이 되었는데 이제서야 인생을 알게 된 듯 하다”
철학이란게 "philosophy" 라는게, 풀자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어렴풋 하지만 철들어 공부하고 이제는 자신의 업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철학자에게서 이런 얘기를 듣게 될 줄이야.
그의 얘기가 궁금해졌다.
“내 젊은시절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던 내 부모님은 지금의 나보다도 더 어린 나이였고, 아저씨라고 생각한 군인은 알고보니 애들이지 않은가? 나이들면 어른이 되고 사려깊은 사람이 되는 줄 알았지만 오십이 넘어서도 여전히 미숙하다.
칠십이 되었다고 특별히 달라지지 못할 것이란 걸 이제는 알게 되지 않았는가? 결국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
인생의 숨겨진 진리를 찾지는 못했더라도 철학따위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던 나보다는 진리에 한참은 더 가깝게 오래전부터 살고 있을 거라는 믿음이 무너져내린다.
어쩌면 인생이란게 그 지식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설사 그것이 철학이라 할지라도, 사는게 무언지에 대한 깨달음은 시간이 필요한게 분명하다.
공자도 오십이 되어서야 지명이 가능했다지 않는가? 그 전에 불혹도 하고 지립도 하고 살아오면서 말이다.
그가 이제야 알게된 인생은
“즐겁게 사는거다. 늙어서 자식들에게 손벌리지 않고 지금 가능한 것들은 향유하면서 즐겁게 사는거”
라고 정리되었던 듯 하다.
수 천년전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 철학을 넘어 칸트, 니체를 지나 들뢰즈니 라깡을 건너온 철학자에게도 인생은 이제서야 알 것 같으니 일면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이제야 알게된 그의 인생이란게 어려운 철학적 정의도 아닌 우리의 흔한 말들로 정리되는 것에는 안도하게 한다.
인생이란게 뭘 배웠다고 더 일찍 아는 것도, 더 많이 아는 것도, 특별히 다른 뭔가를 아는 것도 아닌듯 하니 말이다.
2018년 새해가 벌써 열흘도 넘게 지났다.
새해가 되면서 모두가 공평하게 한살씩 먹는 “세는 나이”는 이제 우리나라에만 남았다고 하지만, 억지로 “만” 나이니, “호적나이”니 하면서 억지 뒷걸음 한들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오십이 되니 정말로 “지천명”을 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지만 서른이나 마흔과는 다른 것은 특별한 감상적 기분과는 다른 다소의 냉정함이 있음을 느낀다.
먼저, 다소 겸손해 지거나 겸손해지려 한다.
수 천년전 소크라테스가 얘기하기를,
"아무도 자진해서 그릇된 짓을 하지는 않는다”
그의 철학적 진리는 여러모로 해석되고 반박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철학이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되풀이되어 읽히고 거론되는 것은 진리의 변하지 않는 한 부분을 그것도 가장 상식적이면서도 근본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명제이기 때문일 거다.
꽤 오랜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책 “미움받을 용기”는 아돌러 심리학으로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책이다.
다소 낮선 ‘아돌러 심리학’은 내용의 대부분은 그리스 철학에 닿아 있는 듯 하다. ‘목적론’이라거나 은둔형 외톨이도 자신에게 선이 되는 것이기에 외톨이를 선택한 것이라는 분석은 소크라테스의 말 ,”아무도 자진해서 그릇된 짓을 하지는 않는다’에 닿아 있다.
행복을 타인에 대한 공헌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편익이 타인에게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 플라톤의 “국가”의 그것과 다를게 없기도 하다.
문득 보다 젊은 나이에 이러한 철학적 진리를 알았더라면 조금은 다르게 살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보다가도 단어나 문장이 이해가 될 수는 있었겠지만 여전히 나를 예외로 한 ‘황금률’처럼 생각했을바에야 달라질 것도 없었겠다는데에 이른다.
책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에 대한 지나친 관심만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에 대한 관심만으로는 불가피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오십이 넘으면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면서 타인과 세계가 새롭게 보이게 되는 모양이다.
나이 듦. 늙음이라고 해서 마냥 슬퍼할 것만도 아닐일이다.
또 하나는, 죽음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게 된다. 적어도 조금은 더 말이다.
죽음에 대한 얘기 중 가장 많이 소개되는 것이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인 듯 하다.
“난, 내가 조끔식 조금씩 산을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산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고 있었던 거야. 정말 그랬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엔 산을 오르는 것이었지만, 실은 정확히 그만큼씩 내 발밑에서 진짜 삶은 멀어져 가고 있었던 거지...그래, 이제 다 끝났어. 죽는 일만 남은 거야!”
소설 속에서 이반의 마지막에 ‘죽음은 끝났어’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라고 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듯도 하다. 이것이 톨스토이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이반의 죽음을 대하는 가족과 친구, 동료들은 이반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는 듯 보이지 않는다. 이반의 빈자리를 누가 차지하게 될런지 혹은 이반의 죽음으로 생계를 고민하는 아내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 실상은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임을 보여준다. 타인의 죽음 말이다. 자신은 비켜갈 것 같은 언제까지나 보류될 것 같은 죽음 말이다.
지천명의 오십을 따지자면, 이반의 나이가 사십대 중반이었기에 아직도 타인의 죽음만 볼 줄 아는 나이는 아니였을까 억지를 부려본다.
새해가 바뀌자 마자 중학교 시절 친구의 부음을 듣게 되었다.
이십년도 넘게 만나지 못했지만 유쾌한 어릴적 기억을 가지고 있는 친구였다. 아직은 자연사로 받아들이기에는 이른 나이이고, 남겨진 어린 아들이 있다는 말에는 안타깝기만 하다.
특별한 애도의 방법이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먼거리라는 합리적 변명을 나와 다른 친구들에게 보이며 이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지 하면서 부의금을 대신 전달하는 것까지다.
이러한 형식적 편리성은 친구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특별한 애도도 하지 않는 것 또한 감추기도 한다.
조문의 예법과 순서에만 신경을 쓰는 소설속 이반의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친구나 동료밖에 없었던 것인가라고 한숨 쉬면서도 말이다.
“지명”의 나이이지만 여전히 죽음은 타인의 것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내 순서가 무한대로 보류되거나 연기될 것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이것은 내 미래가 한발짝 앞도 어떻게 될지 분간할 수 없는 여전히 유동적이고 불안의 무거운 덩어리를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머물 수 없기에 다음 발을 내딛어야 하고, 다만 그 발걸음이 조금은 탄탄하기를, 혹시라도 "헉"하고 내려 앉더라도 너무 오래지 않아 다음 발을 내딛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