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있을 때는 매일 아침 몽마르뜨 언덕을 올랐다.
그 가파른 언덕을 매일 올랐던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파리를 둘러보기 시작한 첫날, 그날 아침 우연히 몽마르뜨 언덕을 오르게 됐고 그 아침 일과는 어느새 나의 루틴이 되었다.
유명한 여행지가 대부분 다 그렇겠지만은, 방해를 받지 않고 느긋하게 즐기기에는 이른 아침이 가장 좋다.
낮에는 붐비고, 늦은 밤에는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어느 날은 질펀하게 늦잠을 자고 점심시간 무렵 언덕을 올랐다.
한참을 걸으니 저 끝에 희미하게 사크레쾨르 성당과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로 가득 차있는 몽마르뜨는 그런대로 볼만했다.
거리의 화가들은 난전에 모여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계단 위에는 공연을 하는 예술가들과 그 광경을 구경하려는 여행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생기 있는 파리의 모습이다.
나는 그 아름다움에 흠뻑 젖기 위해 적당한 계단을 찾아 먼지를 대충 털고 앉았다. 차가운 돌계단에 앉아 멍하니 주변을 구경하는데, 그 순간 검고 커다란 손 하나가 내 팔목을 꽉 움켜쥐었다.
다름 아닌 팔찌 강매단이었다.
몽마르뜨 팔찌 강매단의 위용은 이미 수차례 들은 적이 있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당해보기는 또 처음이다.
이른 아침에만 언덕을 오고 간 탓이었다.
나보다 덩치가 한참이나 더 큰 그는 두꺼운 손가락으로 요리조리 팔찌를 묶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 보는 그가 내 두툼한 팔목에 팔찌를 묶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
왜냐고?
그때 내 주머니에는 돈도 몇 푼 없었고, 그들이 탐낼만한 소지품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공짜 팔찌가 생기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잠시 후, 금세 팔찌를 다 묶은 그는 내 팔목을 그대로 내팽개치더니 얼굴 앞으로 손을 들이밀었다.
대충 돈을 달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이때다 싶어, 뻔뻔하게 주머니를 까 뒤집으며 가지고 있는 돈이란 동전 몇 개가 전부라는 것을 그에게 알렸고, 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던 건지 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게 무슨 짓이냐고 역정이라도 냈겠지만은 오늘은 별로 상관없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었으니까.
그는 한참 동안 내 몸을 수색하더니
"You so lucky"라는 3 단어만을 남긴 채 떠나갔다.
주머니에 남아있던 동전을 하나도 가지고 가지 않은걸 보니 본인이 보기에도 내가 꽤 불쌍해 보였나 보다.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그날도 역시 아침 일찍 몽마르뜨 언덕을 오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숙소에서 언덕은 크게 멀지 않은 거리여서, 작은 보폭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데 문뜩 생기 넘치는 몽마르뜨가 이른 아침의 몽마르뜨 보다는 더 예쁘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서서 생각을 하다가 나는 걸음을 되돌려 숙소로 다시 돌아왔고 오늘은 점심을 먹고 언덕을 오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가로이 점심을 때우고 언덕을 향해 걷는데, 어제 만났던 팔찌 강매단들이 보였다.
나는 뻔뻔스레 그들에게 손 흔들며 인사를 했고, 그들은 우르르 걸어와 내 주위를 에워쌌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오늘 역시 가진 게 하나도 없는데...
그들은 잠시 동안 내 몸을 뒤진 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나더러 위로 올라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어제 채워진 내 손목 위의 팔찌를 가리키며 땡큐를 외친 후 언덕을 올랐다.
그다음 날 역시 오후에 언덕을 올랐다.
오늘은 그들이 먼저 내게 인사를 걸었다.
"How are you today?"
.
나는 웃으며 답했다.
"Very good because of your kindness"
.
그들 역시 웃으며 화답했고 이날부터는 언덕을 오르는데 더 이상 수색의 절차가 필요 없었다.
다른 무리가 내 손목에 팔찌를 채우려 하는 날에는 그들이 나서서 내가 쥐뿔도 없다는 것을 사방에 알렸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그들에게 쩔쩔맬 동안, 나는 성당으로 아무 방해 없이 올라갈 수 있는 프리패스를 얻은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나는 어김없이 언덕을 올랐다.
그날은 성당까지 올라가지 않고, 언덕 중간쯤에 있는 벤치 까지만 올랐다.
5시간쯤 후에 나는 파리를 떠나야 했기에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그날 역시, 한가로운 파리의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멍을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매일 만나는 그 팔찌 강매단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나에게 짧은 인사를 건넨 후, 뜬금없이 자신의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뭐라고 하는지 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오늘은 장사가 잘 안된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그러면 이참에 나쁜 짓은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게 어떻겠냐고 되물었다.
그는 자신도 그것을 원하고, 다음 주에는 면접까지 잡혀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세세하게 캐묻지는 않았지만,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같은 자리에 앉아 꽤 오랫동안 수다를 떨다가, 나는 벨기에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리를 다녀온지도 벌써 2년이 넘게 지났다.
매일 아침, 몽마르뜨 언덕에서 만났던 그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을까?
가끔씩 그가 생각나기는 하지만,
언덕에서 처음 보는 이에게 팔찌를 채우는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