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angillness
Jun 02. 2020
일부러 돌아가는 중.
빙 돌아갑니다. 귀찮아도, 힘들어도.
빙 돌아가는 길이 어쩌면 가장 빠른 길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몇 번을 똑바로 가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맞바로 가곤 했었다.
똑바로 걷지 않으면, 시간이 아까워 미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똑바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 일 것이라는 나의 착각에서 생긴 일이었겠지.)
모든 길에, 모든 일에 직선으로 달려간다는 것은 에너지의 소모가 상당한 일이었다.
육체적인 에너지는 이미 텅 비어,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정신적인 에너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똑바로 달려가서 모든 일이 잘 해결된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똑바로 달려가다 넘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꼬꾸라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그 고통은 이루 다 말하지 못하곤 했다.
단단하고 곧게 뻗은 가지는 더 잘 부러진다.
곧은 나무가 먼저 베어지기도 한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나의 가지가 한순간에 '똑'하고 부러지는 고통은 잠잠하기만 했던 내 입속에서 절로 '억'소리가 나게 할 만큼 나를 아프게 했다.
그렇게 몇 번을 단단해지고, 몇 번을 '똑'하고 부러진 나는 더 이상 똑바로 가지 않기로 했다.
단단하게 살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말이다.
말랑해지기로 했다.
가까운 길이라도 빙 돌아가기로 했다.
단단해지기에는 내가 너무 무른 사람이라,
똑바로 가기에는 내가 금방 지치는 사람이라 그냥 그러기로 했다.
몇 년을 빙 돌아가기만 했다.
늦은 적도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매번 늦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빨랐던 적도 있었다.
네팔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사실 길을 잃었다고 말하기도 뭐한 게, 주머니에서 핸드폰만 꺼내서 지도 어플을 켜면 얼마든지 금방 찾아갈 수 있는 거리에 길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도를 켜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기가 귀찮기도 했지만, 그런 단순한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체념하고 천천히 길을 걸었다. 해가 질려면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고, 별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자발적으로 길을 잃은 것이었다. 일부러 돌아가기로 한 것이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니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예쁜 골목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작은 화면 속에 고개를 푹 박고 걷기만 했더라면 절대 마주하지 못했을 풍경이었다.
사람 냄새를 맡았다.
내가 걷고 있는 (어색하지만, 익숙했던) 평범한 그 골목 위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작은 노점을 운영하는 하는 아줌마들,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는 담배가게 아저씨, 아빠한테 엉덩이를 맞으며 숙제를 하고 있는 아이들.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보잘것없다면 보잘것없는 그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 지금,
내 삶의 원동력이 되었고, 앞으로의 삶을 이어갈 이유가 되기도 했다.
나는 참 재미없는 사람이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사랑하긴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서 어떠한 흥미를 이끌어 낼 수 있을 만큼 특이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때, 내가 골목에서 만났던 그 사람들. 그들은 모두 지극히도 평범한 그런 사람들이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들은 그 무엇보다도 흥미로웠고, 지금에 와서는 나를 자극시키는 유일한 요소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상 속에 갇혀 하루 종일 쳇바퀴만 돌고 있던 나를 이상한 나라에 덜컥 놓인 것처럼 만들어 줬던 사람들.
계속되는 궁금증으로 나를 여행에 중독시킨 그런 사람들.
그런 미지의 세계를 처음으로 맞닥뜨렸을 때에 자극은 그 무엇보다도 뜨거웠고, 강렬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한참을 걷다 보니 골목길 저 끝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지난번 방콕에서 만난 배낭여행자였다.
그녀가 네팔에 갈 것이라는 것은 이미 질리도록 많이 들은 후였으나, 그게 지금이라는 것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와 연락을 영 끊고 지낸 것은 아니었지만, 멀고 먼 타국에서 핸드폰보다는 작은 책 한 권을 더 자주 꺼내는 나로서는 그녀의 소식을 알기는 어려웠다.
내가 잘 못 본 것이 아닌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그녀가 환한 미소를 띠면서 나에게 뛰어왔다.
우리는 골목길 찻집 작은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회포를 풀 수 있었다.
내가 미로 같은 그 골목길을 조금 더 일찍 빠져나왔더라면, 작은 핸드폰에 고개를 푹 박고 앞을 내다보지 않았더라면 그녀를 만날 수 있었을까?
질기지 않았던 우리의 인연을 지금처럼 튼튼하게 만들 수 있었을까?
돌아간다는 것은 다만 늦게 간다는 것은 아니다.
돌아가야만 마주치는 길이 있고, 돌아가아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때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천천히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더 나아졌을까? 더 행복했을까?
물론, 그 질문의 답은 평생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앞으로도 쭉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 돌아 우연히 만나게 되는 그 길이 좋아서,
돌아가야만 만날 수 있는 그 사람들이 좋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