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말은 어른이 되는 과정이 아닐까?

by sangillness

빈말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나 역시도 어색한 대화의 포문을 열 때는 '빈말'이라는 녀석을 최선봉에 세워 앞질러 나가곤 했다.

말 그대로 비어있는 말, 실속 없이 속이 텅 비어 가벼운 인사치레나 따분한 위로 정도로 밖에 쓰이지 못하는 그 말을 우리는 왜 그리도 남발하며 살았을까.




나는 남의 말에 크게 신경 쓰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다.

워낙에 둔감한 편이어서 말속에 숨겨진 가시를 알아채지 못하고 삼켜버리기 일쑤였고, 기분이 언짢은 이야기가 들릴 때는 자동으로 귀가 닫히기도 했다. 게다가 매사에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나에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저 모르는 언어로 쓰인 노래 가사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고막이 삐쭉거리며 바로 반응이 튀어 나가는 몇 가지 문장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대부분 빈말이었다.


누군가가 호의로 건넨 빈말을 받아본 나는 곧바로 그들에게 되묻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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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인가요"

"진짜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니,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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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학창 시절 상을 받을 때는 상장에 으레 쓰이는 미사여구에까지 딴지를 걸었으니,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싶다.


어릴 때는 빈말이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목적성을 띈 친절이 보일 때면 강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고, 의심병 환자처럼 빈말을 캐내어 진위를 가리기도 했다. 하지만 매번 그랬듯, 세상에는 이유 없는 불편함이 그리 많지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에게도 빈말이 꼭 필요해지는 상황이 찾아왔고, 결국에는 그것에 순응하며 할 수 없이 빈말을 사용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어색했던 빈말이 익숙해지면서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빈말의 순기능을 깨닫기도 했으니, 빈말을 지금 나의 삶에서 완전히 떨어뜨리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빈말이 만연한 우리 사회를 바라볼 때면 심드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굳이 그렇게까지 애써가며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 속이 텅빈 말을 아무 영혼 없이 마구 쏘아대는 것이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심도 든다. 심지어 요즘에 와서는 직언이나 충언을 하라며 강요받기도 하니, 나로서는 참 난감한 일이다.

그리고 전혀 사실이 아닌 거짓말을 빈말로 쓰자니 너무 터무니없어 상대방에게 걸릴까 노심초사하게 되고, 그렇다고 밋밋한 빈말을 사용하자니 또 빈말로써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이렇게 신경 써서 힘을 실을 때가 자주 찾아오는 것을 보, 빈말이라는 녀석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빈말을 사용하는 빈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나만을 위했던 화법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먼저 의식하게 되는 것. 조금 더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빈말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나에게 빈말은 그 정도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모든 것을 터놓은 아주 친한 사이에서까지 빈말을 주고받지는 않지 않던가. 내 빈말의 기저에는 어쨌거나 불편한 사이에서의 불편한 대화와 또 상대방을 어쩔 수 없이 위해야만 하는 나의 부담감이 깔려 있었다.


빈말이라는 것이 단순히 속만 비어있는 말인 건지, 아니면 꼭 거짓말로 가득 차 있어야만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필요 혹은 의식에 의해서 상대방을 위하는 화법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조금씩 의식하며 어쩔 수 없이 감수하게 되는 시점, 마냥 어렸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그 시점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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