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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Sep 24. 2020

여행과 힙합, 그리고 흔적

어떠한 형태로든 남았다.

그럭저럭 볼만한 경치앞에 두고 있었다. 해 질 무렵 방콕의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언덕 아래쪽에서 잔잔한 자동차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태국에서 차 소리를 들으면 온몸에 힘이 풀린다. 주변 여느 나라들과는 달리 누구도 경적을 울리지 않기 때문이겠다. 끈적한 바람이 불자 매연이 코를 찔렀다. 다 좋은데 오래 있으면 목이 칼칼해져서 그럭저럭 볼만한 경치다.


녹슨 철제 계단 사이로 해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스피커에서는 어김없이 포스트 말론이 흘러나왔다.

"They make that thing go grrrata-ta-ta (Pow pow pow)"

방콕 도심이 훤히 보이는 언덕에서 외국인 두 사람 총 쏘는 시늉을 하자, 주변에서 한바탕 웃음소리가 흘렀다. 땀으로 흠뻑 젖은 해리는 내 옆에 앉아서 담배를 말았다. 그가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은 침을 묻혀가며 담배를 말 때 빼고는 없다. 그는 몇 분 동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담배 두 개비를 말았다. 그러고 나서는 인심 쓰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하나를 들이밀었다. 하나 필까도 싶었지만,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해리 자신도 모르는 눈치라 그냥 괜찮다고 말했다.


찌는 더위와 숨 막히는 담배 연기 사이로 텐타시온이 다음 노래를 시작했다. 해리는 분명 런던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난 그야말로 샌님인데, 노래만 나오면 플로리다에서 온 갱스터가 된다. 담배 연기가 조금 가시고, 심란하게 나부끼는 해리의 더블링 사이로 잔잔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한 시간쯤, 해리만의 텐타시온 추모 메들리가 흘렀다가 멎었다. 그의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해리는 플로리다에서 온 갱스터가 되었다가, 브롱스에서 활동하는 마약상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전화벨이 울리자 세상 둘도 없는 효자가 되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낄낄 웃었다.


뱃속에서 '꼬르륵'소리가 울렸다. 우리는 언덕을 내려가 맥도널드로 들어갔다. 하루 대부분을 미국 발음으로 쏘아대던 해리의 혀 맥도널드에서 주문할 때만큼은 영락없런던 시민의 것이 된다. 몇 년은 청소하지 않은 듯한 에어컨 필터 냄새를 뚫고 콘 파이 냄새가 매장을 뒤덮었다. 뜬금없지만 새로운 나라를 여행할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맥도널드 햄버거의 맛은 분명 나라마다 다르다. 태국의 빅맥은 한국의 빅맥과는 달리 번에서 진한 콘 파이 냄새가 난다. 태국 시그니처 메뉴인 콘 파이 냄새가 여기저기 뱄기 때문일 것이다.


서둘러 햄버거를 해치우고 밖으로 나왔다. 내일 새벽 방콕을 떠나려면 부지런히 잠을 자 둬야 한다. 이별에 지친 우리는 나중에 볼 수 있으면 또 보자는 기약 없는 인사를 하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해리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처음 듣는 아무개의 믹스테이프 소리가 걸음을 뗄수록 희미해졌다.

길가에 펼쳐진 노점을 지나, 삐걱거리는 방문을 열고 좁은 침대에 곧장 몸을 뉘었다. 그 다음에는 가만히 눈을 감고 오늘 지나간 일들을 되새겼다. 아침에 만난 쌀국수 가게 아저씨도 그렇고, 해리도 그렇고 모두의 개성이 참 짙었던 하루였다. 어느 한 곳에 쭉 있었으면 절대 그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따라 여행이 평소보다 더 괜찮아 보서 뻐근했던 다리가 조금 나아졌다.


여행이란 여행을 제외하면 아무런 공통점 없는 사람들이 철저한 우연에 의해 한데 모이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런 만남의 극소수만 오랫동안 이어지고 나머지는 전부 흩어져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겠지. 순간 정든 도시를 떠날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행을 다니면 다닐수록 이별이라는 여행의 민낯을 더욱 세세하게 마주치는 것 같아 조금 버겁다.


나는 워낙 마음의 그릇이 작은 사람이라, 한 번에 여러 가지를 품을 수 없다. 누구든 그렇겠지만 나는 특히 더 그렇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모든 것들을 위해서는 계속해서 떠나야 한다. 지만 모든 이별을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매 여행의 끝에는 설렘보다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다. 그 아쉬움은 때로는 힘겹지만 내가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유일한 증거기도 하겠다.


이별의 기운이 에어컨도 없는 좁은 방 한 칸을 휘저었다. 나는 스산한 바람을 맞으며, 내가 로봇이 아니었음에 안도하며 깜빡거리는 천장의 불을 껐다. 그렇게 방콕에서의 마지막 불빛이 사라졌다.




방콕을 세 번째로 떠난 지 석 달쯤 지난날, 소파에 가만히 앉아 노래를 듣고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몇 년 전부터 들었던 익숙한 노래들을 지나 플레이리스트는 끝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는 내가 평소에 듣지 않던 힙합이 무더기를 이루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찾아 모두 떠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노래 속에 아직 해리가 잔뜩 묻어있었다. 이미 흐른 시간들이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그러다 문득 내가 떠나온 모든 것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아직 내 주변에 남아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을 쥐어짠 듯 호흡이 가빠졌다. 여행의 흔적이, 그리고 그 숨결이 뒤늦게 도착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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