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염없이 걷다가 발길이 멈춘 곳은 작은 공원이었다. 학교 운동장의 반 정도 되는 크기였고 잔디밭 사이에는 너덧 개의 벤치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공원 맨 끝에 놓인 벤치 위에는 도시락을 손에 든 노부부가 앉아있었다. 나는 조심조심 걸어가 그들 뒤에 앉았다. 사람의 온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모두의 손길이 따뜻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의 손길은 아무 감정 없이 미지근했고 또 다른 이의 손길은 목적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심장이 아리도록 차가웠다. 사람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사람에 지칠 때면 나는 또 다른 사람을 찾아 그 식은 마음을 덥히곤 했는데, 그러는 데에는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따뜻한 사람들을 찾는 것. 그리고 세상이 아직 따뜻하다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공원에서 만난 노부부는 모든 것이 익숙해 보이는 한 쌍이었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마음이통하는 듯했고 시선은 항상 정 반대방향이어서 언제든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오해가 생길 만도 한데, 한 번쯤은 눈길이 엇갈릴 만도 한데 그들은 거울처럼 서로를 따라다녔다. 얼마 후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바지춤을 여미기도 했으니, 그 모습은 얼마나 따뜻하고 또 편안한가.
일흔이 한참 넘어 보이는 두 노인은 천천히 도시락을 까먹었다. 할머니가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에 맞춰 할아버지가 테이블에 손수건을 깔았고, 빵을 먹다가 목이 막혀올 때쯤이면 번갈아가며 서로의 얼굴 앞으로 물병을 들이밀었다. 또 할아버지는 할머니 입가에 묻은 빵가루만을 바라보다가 간신히 턱 아래에 손을 받쳤다.
나는 진짜 사랑을 훔쳐보고 있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사랑일 수 없다. 가방을 뒤적이며 카메라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사진으로만 남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짓궂은 알람이 하필이면 지금 울린다. 시간이 조금은 더디게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시간은 더욱 냉정하다. 떠나야 하는데도 쉽사리 떠나지 못했고 마음을 떼어놓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을 가슴속에 새겼다. 그리고 그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원을 떠난 지 1시간쯤 후에 나는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 안에 있었다. 덜컹거리는 소음과 규칙적인 진동 속에서 아까 본 장면이 너무나 생생히 스쳤다. 몇 가지 장면은 태풍처럼 눈앞을 휩쓸고 지나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는 '나의 사랑은 어땠나'로 장면이 바뀌었다가 다시 조금 전의 기억 속으로 회귀했다. 지나친 온기로 눈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예상 못 한 열기에 삽시간이 심장이 데어버렸기 때문이겠다. 내 기억이 언제까지나 모든 순간에 미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문뜩 그러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사진이나 찍어둘 걸 그랬다.
기억의 어딘가를 맴도는 사이 머리 위 스피커에서 방송이 울려 퍼졌다. 벌써 도착한 모양이다. 새로운 도시에는 또 어떤 사랑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중에 내 것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다. 사랑은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