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카라를 건너뛰기로 한 이상 어떻게든 카트만두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자주 가던 카페를 향해 걸었다. 타멜 거리는 언제나와 같이 평온했다. 불교용품점 앞을 지날 때면 진한 향내가 코끝을 간지럽혔고, 사원 주변을 걸을 때면 마니차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도시를 가득 메운 따뜻한 공기를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이미 카페는 지나친 후였다. 다시 뒤로 돌아갈까도 싶었지만, 넘치는 생각을 정리하기에 걷기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호젓한 걸음으로 버거운 기억을 뛰어넘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너의 기억이 이토록 진한 까닭은 너와 함께한 겨울이 따뜻했기 때문이고, 봄이 포근했기 때문이고, 결국에는 내가 널 사랑했기 때문이겠다.
족히 두 시간쯤은 걸었던 것 같다. 어느새 해는 내 머리 바로 위까지 떠올랐다. 다리가 점점 부어올라서 발을 내디딜 때마다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금방 돌아올 것이라며 슬리퍼를 신고 나온 탓이다. 뒤를 돌아보니 타멜로 가는 길은 아득하게만 보였다. 지친 몸을 쉬게 하려 잠시 돌계단에 앉았다. 온몸에 힘을 풀고 멍하니 한숨을 내쉬는데, 위층에서 싱잉 볼 소리가 들려왔다. 듣자마자 인상이 찌푸려지는 그런 쇳소리가 아닌, 정말 녹듯이 힘이 풀리는 편안한 소리였다. 나는 뭐에 이끌린 듯 그 소리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얼떨결에 들어간 명상센터 안에는 젊은 외국인 몇 명과 나이 지긋한 네팔 아저씨 한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인기척을 내려야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눈을 감고 무언가에 열중하여 있었고 싱잉 볼 소리를 제외하면 실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사진을 찍을까 했지만, 셔터 소리가 크게 울릴까봐 이내 마음을 접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사람들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아무도 신호를 주지 않았지만, 그들은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 동시에 눈을 떴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멀뚱히 서 있는 내 모습을 본 한 명이 이리로 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얼떨결에 대열 한가운데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아직도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멍하니 앉아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고, 강사로 보이는 아저씨 한 명만 분주하게 인센스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명상의 시간이 시작됐다. 아저씨는 다시 한 번 천천히 싱잉 볼을 돌렸다.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창문이 흔들렸고, 그 울림에 맞춰 모두가 눈을 감았다. 나도 슬쩍 눈치를 보다가 서둘러 눈을 감았다.
자칫하면 잠이 들 수도 있는 포근한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고 자세를 교정시켰다. 그리고 귓속말로는 복식호흡을 하라며 나긋이 이야기했다. 한동안 그의 말에 따라 숨을 쉬고 있으니, 이번에는 그가 내 한쪽 콧구멍을 틀어막았다. 교호 호흡을 유도하려는 것 같았다. 그의 손에 묻어 있던 아로마 오일 때문에 내 주변으로는 향긋한 아로마 향이 가득 찼다.
곧 자세와 호흡이 안정되었고, 머릿속에서 잡념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기억은 언제나처럼 그날의 기억이다. 너와 함께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감에 따라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이날의 기억으로 기울었다가, 저 날의 기억으로 움직이기도 했고, 결국에는 그 날의 기억 앞에 넘어졌다. 쓰디쓴 기억이 해일처럼 몰아쳐서 몸을 비틀었다. 그는 내 어깨를 부여잡으며 다시금 균형을 유지시켰다. 숨은 멈출 듯 멈추지 않았으며 몇 분 동안 아슬아슬한 상태가 지속하였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꺼억꺼억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장마철 빗물처럼 조용히 쏟아져 내렸다. 그것이 미련인지 아쉬움인지, 아니면 그리움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묵직한 기억에 조용한 공기가 어우러져 감정은 더욱더 깊어졌다. 슬쩍 눈을 떠볼까도 했지만, 눈물이 앞을 가려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다시 눈을 감고 남은 눈물을 모두 흘려내었다.
그리고 눈물이 모두 마를 때쯤, 격했던 감정이 '와르르'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머릿속이 비워진 모양이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옆에서는 내 또래의 남녀 한 쌍이 나와 비슷한 속도로 눈을 뜨고 있었다. 흠칫 놀라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이제 막 눈을 뜬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