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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Sep 29. 2020

지랄 같은 깨달음

깨달음은 언제나 몇 번의 환멸 뒤에 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리의 떨림은 거세졌다. 완전히 새로운 도시에 떨어지는 시간이 캄캄한 새벽일 것이란 예상만큼 불안한 것은 또 없다. 피로에 찌든 몸을 수시로 비틀었다. 쉴 새 없이 시간을 확인했고, 오후 두 시가 되는 순간 선로에 끈적한 가래침을 내뱉었다. 고도의 불안함과 짜증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해두자. 화물 기차 한 대가 매연을 내뿜으며 플랫폼을 가로질렀다. 기차의 비산식 화장실에서 쏟아져 나온 오물은 나를 비웃듯 불쾌한 냄새를 뿜어냈다.


벌써 열 시간이다. 일상처럼 일어나는 기차 연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분노를 삭였다. 하지만 내 주변의 모두는 열댓 시간 연착쯤이야 별일도 아닌 듯 너무나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깨달은 듯한 사람들이 나를 그저 한낱 투정쟁이쯤으로 여기는 것 같아 더욱 짜증이 났다. 배낭 오른쪽에 꽂아둔 물통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미지근한 물을 아무리 들이켜도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몇 시간 전부터 책을 꺼내 들고 있었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배낭이 어깨를 짓눌렀다. 읽히지도 않는 종이 쪼가리 한 무더기를 뭐하러 챙겼을까 후회됐다. 책과 사진은 그 속성이 참 오묘한 것이, 버릴라치면 괜스레 멈칫하게 된다. 정말 그것이 필요 없을지라도 말이다. 솔제니친의 책을 차마 선로로 던지지 못하고 다시 가방에 넣었다. 순간, 그가 겪었던 수용소 생활이 떠올라서 부렸던 짜증이 부끄럽게 느껴졌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기지개를 쫙 켜며 외쳤다. “참, 지랄이다!” 추레한 외국인이 던진 단발의 외국어에 모두가 시선을 던졌다가 곧 거두었다.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고 플랫폼을 종횡했다. 그럴 때마다 다리는 더욱 덜덜 떨고, 어깨는 뻐근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움직이라도 않으면 뻥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열두 시간이다. 글러 먹었다. 해가 떠 있을 때 도착하는 일은 이제 없다. 서늘한 벽에 기대 잠깐 눈을 감았다. 선잠에서 깨어났을 때, 주변에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 느려도 너무 느리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치켜뜨고 거지 같은 기차역의 분위기를 마셨다. 여전히 지랄이다. 이번에는 배낭 왼쪽에 꽂아둔 물병을 꺼냈다. 미지근했다. 1.5l짜리 물병을 들이켜는데, 옆통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커다란 터번을 두른 할아버지가 나를 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째려본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는데, 그때 나에게 향한 모든 시선은 그렇게 다가왔다. 속으로는 '또 시작이네'를 외치며 세상을 포기한 듯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끝끝내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이미 지칠 때로 지친 나는 그 맹렬한 눈빛을 피하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내 귓가로 굵고 강렬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와 닿았다. “아무리 더뎌도 어쨌거나 시간은 흐른다네.”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돌아가 톱니바퀴가 잠깐 멈춘 듯했다. 하지만 방향을 틀어 그를 바라보거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길거리 철학자들 입에서 나온 이야기치고는 얼추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제 만났던 사기꾼도, 그제 만났던 호객꾼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이 진동하는 이야기일수록 내 주머니가 더 가벼워진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역사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안 된다고는 하는데, 규정상 안 된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다. 기차역은 그런 장소였다. 담배꽁초를 바닥에 터는 순간에 맞춰 호객꾼들이 몰려들었다. 사기를 당하려고 해도 당할만한 것이 없어서 마음이 편했다. 그들은 내 주머니 사정을 읽었는지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흩어졌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보통의 릭샤왈라와 호객꾼들은 하이에나와도 같다. 그들은 육감적으로 가냘픈 사냥감을 찾아내고, 얼마간 농락하다가 뼈까지 씹어먹는다.


콧등에 잠깐 스친 손가락에서 기름기가 묻어 나왔다. 얼굴에 물을 대지 않은 지도 벌써 서른 시간이 넘게 지났다. 배낭을 멘 채로 낡은 벤치에 주저앉았다. 구멍이 뚫린 맨홀 뚜껑에서 역한 냄새가 풍겼다. 그러고 나서는 소리 내어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멀쩡히 앉아있는 내 뒤통수와 팔꿈치를 치고 간 사람들의 숫자였다. 숫자는 어느새 열일곱을 지났고, 열여덟 번째에서 멈췄다. 끙끙대며 매트리스를 옮기던 아줌마가 매트리스로 내 얼굴을 후려친 탓이다.


임계점에 도달했다. 이제 누군가 한 번만 더 나를 건들면 나는 '펑'소리를 내며 터질지도 모른다. 언젠가 방콕의 어느 카페에서 만난 요리사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도축 당한 고기에서는 악취가 풍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 지금 나를 죽인다면, 온 세상에 악취가 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냄새는 너무 지독해서 살아있는 모든 이의 코를 마비시키리라. 다시 역사로 들어가서 '차갑다고 하는' 물 한 병을 샀다. 역시나 물은 미지근했다. 짜증을 부리려다 마음을 접었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는가. 먼지가 소복이 쌓인 스피커에서 누군가의 찢어지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기다린 기차가 열다섯 시간 가까이 연착된 끝에 곧 도착한다는 방송이었다.


마지막 힘을 짜내어 플랫폼을 향해 달렸다. 인제 와서 기차를 놓치면 나는 분명 큰일이 날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사달이 날지는 모르겠는데, 틀림없이 나긴 날 것이다. 그냥 예감이 그랬다. 먼지 쌓인 계단을 오르내리고 한 번 더 올라서 티켓에 찍힌 기차 칸 앞에 도착했다. 아까 나를 째려봤던 시크교도 할아버지도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한참이나 나를 더 째려보더니 한 번 더 이렇게 말했다. "봐, 시간은 흐른다니까."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통행로를 가로막는 엉덩이들을 이리저리 밀어내고 내 좌석으로 향했다. 그 자리에는 역시나 누군가가 앉아있었는데, 가뿐히 그를 내쫓고 그곳에 짐을 풀었다.


기차가 움직였다.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창밖으로 삭막한 도시의 풍경이 움직였다. 중간중간 멈추기도 했는데, 오히려 다행인 일이다. 몇 번만 더 멈추면 나는 사선으로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 기차는 아무런 규칙도 없이 흔들렸다. 나는 그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기차가 목적지 부근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잦게 멈춘다고 해도, 난 그 이상 눈을 뜨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 정도로 피곤했다는 이야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옆자리 아저씨의 땀냄새가 달큼고, 덜덜거리는 선풍기 소리가 감미로웠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기차가 종착역에 멈추고 난 후였다. 모두가 내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어렴풋이 새벽 여명이 보였다. 내가 밖으로 나갈 때쯤이면 햇빛이 도시 곳곳을 비출 것이다. 모두를 먼저 보내고 마지막으로 기차에서 내렸다. 내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더럽게 더뎠는데, 시간이 갔긴 갔구나." 분주하게 주변을 살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른 남자들은 이따금 보였지만 그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깨달은 자의 마지막은 언제나 고요하고 홀연하다. 자꾸 이런 식이면 나는 또 한 번 모든 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사기꾼들에게 몇 번이나 환멸을 느껴야 하고, 아주 가끔 누군가가 던져놓은 한마디를 오랫동안 안고 살아야 한다. 참, 지랄 같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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