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날씨는 너무 무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오늘만 해도 그치지 않고 내리는 비에 온 세상이 어느 정도 젖은 채로 있었고, 물밀듯 쏟아지는 꿉꿉함과 우중충함이 모두의 머리끝을 휘저었다. 하늘이 개고 나면 찌는듯한 더위가 밀려올 것이다. 또 그다음에는 가끔 태풍이 몰아칠 테니, 신중하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날씨를 무모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하지만 비가 내리는 것이 당연해진 올해 8월의 대한민국에서, 무척이나 둔감한 내가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 대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우산을 손에 쥐고 한참이나 거리를 걸었다. 두어 시간쯤이 지났을까, 카메라를 찾으려 가방을 뒤적이는데, 예전처럼 동작이 매끄럽지 않았고 카메라를 손에 쥐는데도 커다란 부침이 있었다. 멍하니 서서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것이 회색빛이고 신발코는 까맣게 젖어있었다. 벌써 저녁이 되었나 싶어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점심시간이다. 머리가 번뜩였다. 꽤 오랜 시간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나서야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나는 날씨에 따라 크게 일렁이는 편이다. 더위에는 까라지고 추위에는 움츠린다. 비가 오면 젖어버리고 눈이 오면 얼어붙는다. 어떤 날씨에나 동작이 굼뜨고 답답한 것은 매한가지지만,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크게 반와하는 감정의 골짜기를 보면 날씨에 일렁인다고 말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뒤늦게 빗소리가 들렸고, 맞부딪힌 팔뚝에서는 끈적함이 느껴졌다. 오늘 날씨는 민감한 내 감정을 또 어떻게 뒤틀어 놓을 것인가.
곧 축축한 분위기 속에 젖어들고 말았다. 10분 전에 머릿속을 채웠던 단어가 컵, 배터리, 노트북이었다면 지금은 시, 바다, 구름 따위다. 어제저녁에 썼던 글이 내 잘못에 관련된 내용이었다면 오늘 쓰고 싶은 글은 분명 이별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아까보다 더 세차게 빗방울이 쏟아졌다. 차라리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차라리 비가 오는 것을 영영 알아채지 못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길 건너에 중고 서점이 보였다. 둥둥 떠다니는 감정은 어김없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서점에 들어서자, 끈적한 공기와 오래된 책 냄새가 만나 코끝을 슬며시 간지럽혔다. 나는 조용히 책장 틈에 자리 잡고, 꽂혀있는 모든 책의 제목을 훑었다. 첫 번째 책장에는 경제 서적이 있었다. 작가들이 똑같은 글쓰기 특강을 받기라도 한 듯 제목은 도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고, 상투적이었으며, 또 딱딱했다. 분명 읽어두면 도움이 되겠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니다. 두 번째 책장에는 자기 계발 서적들이 듬성듬성 꽂혀있었다. '20대, 자기계발에 미쳐라'라는 제목의 책이 보였다. 그러다 문득, 다음 칸에는 '30대, 자기계발에 미쳐라', 그 옆칸에는 '40대, 자기계발에 미쳐라'같은 책이 꽂혀 잊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웃음이 세어 나왔다. 건너편 책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드디어 문학이었다.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쓸쓸하고 또 두툼한 책 한 권이 절실했다.
책들을 한 권 한 권 만지며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반가운 제목이 더러 보였고, 다시는 읽고 싶지 않은 책들도 있었다. 중간쯤 왔을까, 양장으로 된 보라색 책이 눈에 띄었다. 두께는 다른 책들의 1.5배쯤은 될 정도로 두툼했다. 서둘러 책을 꺼네 들었다. 물 빠진 보라색 겉표지는 왜인지 아련한 느낌을 주었다.오른쪽 위에 적혀있는 제목은 '더버빌 가의 테스'였다. 책을 펴지 않았는데도 쓸쓸함이 차올랐고, 어렴풋이 비련의 여주인공 테스가 떠올랐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카운터에서 책을 결제하고, 창문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밖에서는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서점의 아늑한 분위기가 비와 감정을 분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러기엔 창문이 너무 컸다. 쓸쓸한 것은 쓸쓸한 대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비는 비대로, 테스는 테스대로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런 젖어있는 모든 것들 사이에 놓인 나는 나대로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책장은 점점 더 느리게 넘어갔고, 안 그래도 어두웠던 하늘은 조금 더 빛을 잃어 짙은 남색이 되었다. 하늘을 나무라고 싶지만, 어두운 하늘은 하늘대로 의미가 있을 테니 거기에 대고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