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깜깜한 새벽이었는데, 가로등은 고장이 난 건지 맥없이 빛을 잃고 말았다. 일순간 세상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스산한 바람만이 낙엽을 휘날렸다. 몇 초 전만 해도 생생하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보이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이 잠에서 깨어날 때와 비슷한 느낌이리라. 생생한 꿈에서 어두운 현실로, 밝은 빛에서 끝없는 어둠으로.
눈먼 사람이 되어 세상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것이 정말 무서울지 아니면 그런대로 견딜 만할지, 막연한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이다. 곧 있으면 암순응이 끝날 테니, 남은 시간은 길어야 1-2분 남짓이다. 벤치에서 일어나 일자로 펼쳐진 산책로를 냅다 달렸다. 두어 번 넘어졌고, 뒷주머니에 찔러 둔 핸드폰은 사라지고 없었다. 팔꿈치에서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피는 아니었으면, 하고 생각했는데 문득 공원의 위생상태가 떠올랐다. 차라리 피가 낫겠다.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아프기도 했고 무엇보다 무서웠다. 공포영화를 볼 때,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느껴지는 아찔한 공포라기보다는, 가슴 깊은 곳부터 치밀어서 살갗을 조금씩 에는 느낌의 공포였다. 눈머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렵다. 6시를 울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조금씩 날이 밝았다. 떨어진 핸드폰은 맨 처음 앉아있던 벤치 근처에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해 생각했다. 사고든 병이든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시력을 잃으면 사진은 어떻게 되는가.
사진을 찍을 수는 있겠다. 눈을 제외한 온몸으로 그곳의 분위기를 느끼고, 공기를 마시고, 마지막으로 셔터를 누르면 되니까. 하지만 사진을 보는 것은? 그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 그 사진이 언제 어디서 찍은 사진이라고 일러주면 그곳을 머릿속으로 그릴 수는 있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근사한 사진이 내 눈앞에 있어도 나는 그것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여행은 어떻게 되는가.
바라나시를 다녀올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시체 타는 냄새와 각종 똥냄새, 탈리 집에서 나는 향신료 냄새, 사원에서 풍겨오는 향냄새. 길가에 똥을 밟는 느낌, 가트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을 때 느껴지는 딱딱하고 그러면서도 포근한 촉감. 거기에 뿌자 소리나, 땅콩 파는 아저씨의 목소리까지 모든 감각이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서울은 시각을 제외하면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슨 소리였는지 기억나지 않고, 서울을 그렸을 때 뚜렷이 남아있는 냄새도 없다.눈이 멀면 서울은사라진다.나는 지금껏 보이는 것을 빼면 기억에도 없는 '유령 도시'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이 잠시 멎었다가, 꿈이 떠올라서 팔다리를 부르르 떨었다.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것은 꿈에서 깨어나는 한순간일 것이다. 눈이 보이는 채로 살았기에 기억 속에 많은 이미지가 있다. 아마 꿈에서는 그 이미지가 선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꿈에서 깬다면? 나는 다시 어둠의 세계로 돌아간다. 애초부터 없었다면 거기에 대한 미련도 없겠지만, 지금 나는 그렇지 않다. 너무나 과분한 세상을 살고 있다. 매일 아침 시각을 빼앗기는 느낌을 견딜 자신이 없다. 눈이 멀면, 그리고 눈이 먼 채로 꿈을 꾼다면, 나는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는 온몸이 크게 일렁였다.
9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콧등을 짓누르던 안경의 코 받침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라식수술은 받지 않는 편이 낫겠다. 그리고 안경을 쓰는 시간을 조금씩 줄여나가야겠다. 혹시 눈이 멀지도 모르니, 어둠과 희미함에 조금이나마 익숙해져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다. 그냥 안경도 쓰고 라식수술도 받아야겠다. 어둠만 있는 세상을 나는 살아갈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