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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Sep 18. 2020

아무것도 없는 곳

모래를 담은 유리병.

흔들거리는 로컬버스 안에서 염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한 아저씨가 물었다. "윗동네는 뭐하러 가? 거기는 아무것도 없는데." 는 잠시 고개를 버스 천정으로 치켜들었다가 답했다. "윗동네에는 아무것도 없다면서요. 그게 좋아서요."


1시간이 넘게 가다서기를 반복하던 버스는 한적한 시골길에 또 한 번 멈춰 섰다. 기사 아저씨는 시동을 끄고 담배를 물었다. 창밖으로 무너질듯한 버스회사 사무실이 보였다. 그 사무실을 빼면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드디어 윗동네에 도착한 모양이다. 신발끈을 고쳐 매고 사람 냄새로 찌든 버스에서 내렸다.


터미널을 지나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흙길을 걸었다. 이곳에는 땅과 하늘, 그리고 그 중간을 오가는 나밖에 없다. 머리칼을 가볍게 흔드는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곧 그 바람마저도 멎었다. 발걸음이 가붓해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런 고민 없이 텅 비었기 때문이리라.


길가에 나무가 보여서 잠시 그 아래에 앉았다. 꽃도 없고 열매도 없는 나무였다. 나뭇잎 틈으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하지만 거기에도 구름은 없었다. 옅은 베이지색 모래에 왼손을 파묻었다. 그늘에 식은 모래 온도는 내 체온과 엇비슷해서 어떤 느낌나지 않았다. 모래를 몇 번 손에 쥐었다가 허공에서 흩뿌렸다. 마지막으로는 모래를 한 줌 쥐어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아무런 온도도, 냄새도 내지 않는 모래가 나와 퍽 비슷해 보여서였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윗동네 오가는 버스는 하루에 왕복 한 차례밖에 없어서, 타고 온 버스를 놓치면 내일까지 기다려야 한다. 버스 안에는 나와 기사 아저씨밖에 없었다. 내가 주머니에담배를 꺼내 들이밀자, 아저씨는 환하게 웃으며 담배를 받아 물었다. 뻑뻑 내뱉는 담배 연기로, 아무런 말소리도 오가지 않던 버스가 가득 찼다.


도로에 차가 점점 늘었고, 곧 낯익은 건물 아래서 버스는 멈춰 섰다. 윙윙 울리는 도시의 소음이 내 귓가를 어지간히 간지럽혔다. 다시 짜증이 치솟았다. 빠른 걸음으로 한적한 시내를 가로질러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가서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웠다. 옆방에 이스라엘 남자는 오늘도 시끄럽다. 도대체 뭘 하면 혼자서도 시끄러울 수 있단 말인가.


몸을 뒤집을 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주머니를 만져보니, 아까 넣어둔 모래가 있었다. 모래는 아무것도 없이 텅  느낌을 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없는 윗동네가 꿈이나 환상 따위는 아니었. 서둘러 모래를 유리병에 옮겨 담았다.




여행이 끝난 지도 벌써 1년이 넘게 흐른 어제저녁이었다. 이곳저곳에 치이느라 진이 다 빠진 몸을 이끌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문득 지난 여행이 떠올랐다. 방 한 귀퉁이에 쌓아둔 사진 박스를 뒤졌다. 사진 뭉치 한가운데쯤에는 아무것도 없는 윗동네가 있었다. 정신이 멍해지면서 편안했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찾아온 깨달음. '아, 모래!' 


서랍 맨 아래에 놓인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다행히 모래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서둘러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았다. 여전히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순간, 발걸음이 붓해짐을 느꼈다. 왜 그리도 힘겹게 살았을까. 이렇게 빨리 지치는 사람이면서. 다음에 떠날 여행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윗동네에서만 시간을 보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주 긴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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