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gillness Sep 07. 2020

싸구려 인간, 싸구려 여행

싸구려 숙소, 싸구려 여행, 그리고 그 안을 거니는 싸구려 인간.

8월 초의 칭다오였다. 온습한 바닷바람과 끈끈한 한여름의 공기가 엉겨 붙어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여름은 꿉꿉함이, 땀이, 그래서 짜증이 치미는 것이 본래 마땅한 계절이나, 2017년 칭다오의 여름은 이전과도 견줄 수 없는 못마땅한 공기와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숙소는 5.4 광장 근처에 있는 1박에 70위안짜리 싸구려 모텔이었다. 돈도 좀 모였겠다, 이제 게스트하우스는 전전하지 않겠다며 호기롭게 결제한 싱글룸이었는데, 잔뜩 기대를 안고 첫발을 디딘 싸구려 모텔의 상태는 정말 처참했다. 좁다란 복도를 걸을 때부터 곰팡내가 진동했고, 그 곰팡내의 근원지는 분명 내가 일주일간 묵어야 할 좁은 방이었다. 하얀색이었던 벽지는 곰팡이로 가득 차서 고르곤졸라와 로크포르 치즈가 반쯤 뒤섞인 색깔을 내었다. 벽지의 곰팡이 정도야 내가 거기에 살을 비비며 지낼 것도 아니고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누군가의 땀과 타액으로 흠뻑 절여진 침구는 적잖이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숙소에 남아서 쉴 것인지, 더러운 숙소를 피해 밖으로 나갈 것인지 몸과 머리의 끝없는 대립이 시작되었다. 무거운 몸뚱이는 에어컨도 있겠 눈 딱 감고 낮잠이나 자자고 말했고, 갖가지 잡념으로 가득 찬 머리는 이런 최악의 숙소에서 시간을 때우느니 차라리 더워도 밖을 둘러보자고 말했다. 아, 어떤 것을 선택해도 최악이었다. 찝찝한 곰팡내도, 찌는 듯한 39도의 더위도.


한 시간이 넘는 장고 끝에 마음의 표를 얻은 것은 머리와 그 안에 들어찬 약간의 이성이었다. 여러 번 머뭇거리며 간신히 결정을 내린 나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호기롭게 거리로 나섰다. 비좁은 골목 너머로 유명 호텔 체인의 로고가 보였다. 평소대로라면 본 체도 안 했겠지만, 오늘은 그 큼지막한 호텔의 로비가, 수영장이, 널찍한 방 한 칸이 유난히도 부럽다. 아무 생각 없이 고층 호텔을 따라 십여 분을 걸었다. 호텔이 너무 가까워져서 뒤로 젖힌 고개가 뻐근해질 때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저 끝에 청도의 랜드마크 격인 5.4 광장이 보였다.


광장은 그런대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벤치에 앉아있는 내 주변으로 다정한 연인 몇 쌍과 화목해 보이는 대가족이 스쳐 지났다. 짜개바지를 입은 아이가 공원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볼일을 보는 모습에는 흠칫거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 역시 사람 사는 모습이리라.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3시가 넘었다. 점심을 먹기에는 너무 늦은, 저녁을 먹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밥을 먹을까 말까 고민될 때는 차라리 한 끼를 거르는 것이 주머니 사정에 이롭다.


길 건너편에는 택시 정류장이 있었다. 보통 택시를 탈라치면, 온몸에 알러지반응이 일어난 것처럼 자연스레 더 저렴한 교통수단 쪽으로 기우는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점심을 거른 탓이다. 뭐에 이끌린 듯, 택시를 기다리는 행렬 맨 끝에 섰다. 줄은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황급히 지도를 켜고 갈 곳을 찾았다. 그러다 문득, 칭다오 맥주 라벨에 그려진 잔교가 생각났다. 그래, 오늘은 잔교로 가는 것이 좋겠다. 택시 앞좌석에 앉아서, 멀뚱히 칭다오 맥주 로고를 가리켰다. 지도를 보여줬으면 더 수월했겠지만, 그냥 오늘은 그러고 싶었다. 기사 아저씨는 알아들었다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가속 페달을 밟았다.


잔교는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바다 위로 놓인 기다란 다리, 그리고 그 끝에 서 있는 큼지막한 누각. 웅장함에 다리가 휘청거리지도 않았고, 초라함에 고개를 내젓지도 않았다. 앞뒤로만 오가는 군중 사이에 껴서 잔교를 걸었다. 밀려오는 하품을 참으며 다리를 반쯤 걸었을 때, 뜨거운 열기가 뒷목으로 홧홧하게 끼쳐왔다. 양쪽에서 불어오는 미적지근한 바닷바람과 30도를 가뿐히 넘기는 한여름 날씨 때문이다. 내일 아침이면 어지간히 따가울 것이고, 모레 아침이면 허물이 벗겨질 것이다. 시뻘건 토마토 인간이 되어 이번 여름을 보내기 싫다면, 이제는 싸구려 숙소로 돌아가야 할 때다. 생각해보니, 누각 아래 서야지만 누각이 한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떨어진 다리 한가운데가 잔교를 완전히 즐기기에 알맞다. 또 얼결에 잔교로 왔으니, 얼결에 잔교를 떠나야 마땅하다. 다시 길가로 걸어가서 택시를 잡아탔다.


이번에 만난 기사 아저씨는 호탕한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기는 오늘 바쁘다며, 호탕하게 나를 길 한복판에 내려주었다. 어차피 가는 길이었다며 요금도 받지 않았다. 숙소까지는 한참 더 걸어야 한다. 다른 사람 같으면 화를 냈을지도 모르지만, 뼛속까지 싸구려 여행자인 나에게 이것은 1년에 몇 번 찾아오지 않는 행운이다. 땀을 삐질 흘리며 걷다가, 숙소 간판이 보여서 서둘러 길을 건넜다. 수백 수천 대의 전기 오토바이가 내 주변을 스쳐 지났다. 칭다오 운전자들은 운전을 참 잘한다.


숙소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길 건너편에 '뜻 모를 한자, 15위안'이라고 적힌 간판이 보였다. 여름보다 더 뜨거운 훈김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면 분명 식당이다. 다시 한 번 오토바이 틈바구니를 빠져나와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아저씨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다 좋았는데, 에어컨이 없는 것이 참 아쉬웠다. 벽에 붙은 음식 사진을 잠깐 훑어보다가, 만만해 보이는 볶음밥 한 그릇을 주문했다. 내 건너편 테이블에는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그놈의 짜개바지만 아니었다면 참으로 완벽한 분위기겠건만, 이번에도 포동포동한 아이의 엉덩이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주인아저씨가 국수 한 그릇과 새까만 소스를 들고 나왔다. 나는 분명 볶음밥을 시켰는데, 아저씨는 자꾸만 국수를 테이블로 들이민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밥보다는 국수가 만만하다. 그릇을 앞으로 잡아당기자, 익숙한 춘장 냄새가 공기를 물들였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중국식 짜장면인 모양이다. 춘장을 그릇에 털어놓고 대충 비벼서 국수 한 가닥을 삼켰다. 짜다. 점심도 걸렀는데 조금 더 그럴싸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을 걸 그랬다. 대충 그릇을 비우고 식당을 나왔다. 이번에 길을 건널 때는 오토바이보다 차가 더 많았다.


싸구려 모텔로 들어서자, 다시 한 번 곰팡내가 코를 간지럽혔다. 방문을 열고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하수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씻으면서도 찝찝했고, 씻었는데도 찝찝했다. 에어컨이 웅 소리를 내면서 축축한 몸을 말렸다. 냄새나고, 약간 찝찝하고, 시원하고.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하루의 끝이다. 한동안 잠이 들락 말락, 몽롱한 상태가 계속되었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눈 전체를 덮는 순간, 시리도록 차가운 물방울이 이마로 떨어졌다. 나는 '으악'소리를 지르면서 침대에서 일어났고, 에어컨은 '끼익'소리를 내면서 작동을 멈췄다.


주인아줌마에게 항의해볼까도 싶었지만, 곧바로 마음을 접었다. 그 아줌마는 늦은 밤에 나를 쫓아내고도 남을 아줌마다. 괜히 따지다가 길가에 나앉을 바에야,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속 하다. 창문을 열고 방향을 돌려 침대에 누웠다. 발등으로 주룩 떨어지는 차가운 물줄기는 그런대로 버틸만했다. 차가운 물 때문인지 하반신은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웠고, 등판에는 땀이 맺혔다. 맹랑하고 또 적당한 하루의 끝이다. 싸구려 여행을 하는 싸구려 인간에게는 이 정도의 끝이 잘 어울린다.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날씨가 더웠던 것도, 점심을 걸렀던 것도, 국수가 짰던 것도, 에어컨이 멈췄던 것도.



이전 16화 아무것도 없는 곳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