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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Aug 28. 2020

엇갈린 속도

속도가 달라서 엇갈렸고, 자꾸만 엇갈려서 운명은 끝이 났다.

#1

a는 프놈펜에 있었다. 호찌민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잠깐 들른 도시였는데, 막상 떠나려고 하니 감정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a의 시선은 자꾸만 시계로 향했다. 남은 시간은 겨우 반나절 남짓이다.

a가 프놈펜과 작별하는 사이, 반대로 b는 프놈펜으로 가는 버스 안에 있었다. 겉보기에 잘 포장된 도로를 달리고 있었으나, 버스는 유난히도 덜컹댔다. 머리를 서너 차례 창문에 부딪혔고 미는 멀미를 두어 번 삼켜냈다. 마지막으로는 정신을 반쯤 잃고 나서야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b가 터미널에 도착한 때는 오후 1시가 약간 넘은 시간이었다. 찌는 듯한 열대 몬순의 공기가 b의 온몸을 뜨끈하게 덥혔다. 터미널 건너편에는 AC라는 문구가 크게 쓰여있는 카페가 보였다. b에게는 시원한 공기와 차가운 커피 한 모금이 간절했다.

a는 카페에 앉아 아쉬움을 삭이고 있었다. 이제 캄보디아에서의 남은 시간은 3시간 정도다. 에어컨 바람은 지나치게 차가웠지만, a의 얼굴은 자꾸만 달아올랐다. a는 창밖으로 펼쳐진 모든 풍경을 외울 듯 그 모습에 집중했다. 시작한 지 채 5분도 되지 않은 집중을 깬 것은 다름 아닌 b가 들어오면서 울린 풍경소리였다.


a와 b의 첫 만남은 머릿속에 진하게 남을 만한 우연이었다. 둘은 등을 지고 있다가 잠시 후에는 마주 앉았고, 몇 분이 더 흐른 뒤에는 커피를 두어 잔 시며 개인적인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마침내 둘은 어쩌면 그들의 만남 자체가 운명 일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운명은 가혹했다. 운명이 어쨌거나 시간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a는 또 한 번 벽에 붙은 시계를 올려다봤다.


a와 b는 곧장 밖으로 나가서 터미널 주변을 걸다. 뙤약볕 아래였지만, 그깟 햇빛 정도야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둘은 땀을 삐질 흘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웃으면서도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근처에 있던 누구는 둘이 손을 맞잡고 걸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둘에게 직접 물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땅으로 내려앉은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a의 그림자가 b의 실제 키보다 길어지면 둘의 첫 번째 이별은 시작된다. 남은 시간은 고작 두 뼘 남짓이다.


어쨌거나 a와 b는 이별했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사실이고 더 이상 덧붙일 말은 없다. a는 사무치는 이별의 냉기 속에서 헤엄쳤다. a가 타고 있는 삼코버스는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아쉬워할 틈도 길게 주지 않을 모양이다.

반대로 b는 이별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은연중에 다음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b는 워낙에 내색하지 않는 편이어서 그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2

둘의 첫 번째 이별로부터 한 달쯤이 지난날, b는 포이펫에 있었다. 태국으로 넘어가기 위해서였다. b만큼 천천히 여행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b는 캄보디아 구석구석을 몇 번이나 둘러보고 나서야 태국행 버스 티켓을 예매했다.

b가 늑장을 부리는 동안 a는 부지런히 움직여서 포르투에 도착했다. 곧 리스본을 거쳐 모로코로 넘어갈 이다. a의 b에 대한 그리움은 커다란 유럽 대륙을 지나는 동안 점점 희미해져 갔다. 어느 날은 문득 '아프리카의 남쪽 끝에 다다를 때쯤이면 완전히 사라지고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이 사실 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b에게 남은 미련 같은 것들이 한데 뒤엉켜 a는 며칠이나 앓았다.


만으로 1년이 흘렀다. a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기업에 취직했다. 하지만 b의 여행은 아직 반도 채 끝나지 않았다. a가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올 동안, b는 천천히 걸으며 모든 것을 보려고 애썼다. a가 여름을 사는 동안 b는 겨울을 살았고, b가 아침을 먹을 때 a는 저녁을 먹었다. 아, 얼마나 더 어긋나야 하는가. 이 정도면 운명, 그리고 세상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싶다.


여느 날과 같이 숨 막히게 살아가던 어느 날, a는 문득 b가 떠올랐다. 아마 잠결이었을 것이다. a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서 지난 기억을 뒤적였다. 하지만 더는 b의 얼굴과 목소리 따위를 기억할 수 없었다. 너무나 빠른 속도에서 사느라 b마저 빠르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남은 새벽을 포기하고 오롯이 b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려고 애썼. 그런데 희석된 기억을 되찾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한 번 잊힌 기억은 이미 지워진 파일과도 같아서 다시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b 역시 a를 떠올렸으나, 그것은 a처럼 급작스러운 무엇이 아니었다. b에게도 a의 사진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가져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b는 매일 10분 정도 a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b는 b만의 속도로 인생을 살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잊었다.


#3

b는 a를 5,000분쯤이나 떠올리고 나서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b가 입국하는 날 a는 서점에 있었다. a가 여행 다니는 동안 읽었던 책들이 시와 소설과 감성적인 에세이 같은 것들이었다면, 지금 손에 들려있는 책은 모두 사회생활과 관련된 것이다. a는 서점을 나와 쓸쓸히 거리를 걸었다. 하지만 그 쓸쓸한 걸음 역시 너무나 빨라서 a는 기어코 본인의 옛 모습까지 추월하고 말았다. a는 자기 자신의 모습었다. 일종의 종말인 셈이다.

a가 모든 것을 잊고 죽은 채로 있는 동안, b는 버스에서 내렸다. 천천히 광화문 광장을 걷다가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벤치에 앉았다. 반대쪽 벤치에는 a가 앉아있었다. 하지만 b는 a를 알아보지 못했다. a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과였으나, 그것은 지금이 아닌 그때 a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a와 그때의 a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었기에 못 알아보는 것이 더 당연한 것 같기도 했다.


a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일어나다가 b와 눈이 마주쳤다. a도 b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a는 왜인지 끌리는 b의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쳐다봤다. b는 배낭을 끌어안으며 일어나 뒤뚱뒤뚱 버스에 올라탔고 넉살 좋게 기사 아저씨에게 인사한 다음, 큰 배낭을 다리 사이에 낀 후에야 간신히 손잡이를 잡았다.

순간 a의 눈앞이 하얗게 바랬다가 가까스로 채도를 찾았다. 뒤늦게 버스를 따라가 봤지만, 또각또각 소리를 내는 a의 구두로는 도저히 그 버스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a는 곧장 택시를 잡아타서 버스를 쫓았다. b는 다섯 정거장 정도 지나서 버스에서 내렸다. a도 b의 모습을 확인하고서는 서둘러 택시에서 내렸다. 


a는 b에게 달려가서 b를 꽉 끌어안았다. b는 적잖이 당황하여 a를 밀어내었다. 깜짝 놀란 a는 자기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를 설명했지만, b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눈앞에 서 있는 어느 평범한 직장인은 자신이 좋아했던 a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a는 눈물을 흘렸고 b는 쓰린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를 떠났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프놈펜에서의 a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4

a는 사표를 내고 긴 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b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방콕에서 치앙마이를 오가는 데만 3달이 넘게 걸렸고, 또 한 번 캄보디아로 넘어가서는 반년이 넘게 구석구석을 살폈다. a의 여정은 b의 지난 여정과 너무나도 닮아있어서 그의 흔적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a가 b의 속도를 맞추는 동안, b는 길었던 여행을 끝마치고 제주도에 정착했다. 가죽 공방에서 일했고, 그러는 중에 작은 카페를 차렸다. 하지만 b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친구 여럿이 가끔 그의 집을 드나들었으나, 그중에 사랑은 없었다. b는 아직 그때 a의 모습을 그리워하느라 마음을 열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 역시 b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다.


3년 언저리가 흘렀다. b의 눈가에는 자잘한 주름이 새겨졌다. b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파리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여행의 설렘이 그의 주변에 가득히 들어찼지만, 그의 여행은 이미 끝난 후여서, 그 감정이 그에게 닿지는 않았다. 쉬지 않고 떠돌던 a의 피부는 까맣게 그을려져 있었다. a는 마침 프랑스 횡단을 시작했는데, 그 시기는 b가 프랑스에 도착한 지 일주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7구에 있는 어느 허름한 식당이었다. b는 친구의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 안으로 들어왔고, 구석 어딘가에서 a는 언제나 그랬듯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그 둘의 세 번째 만남이 한국이 아닌 프랑스에서였다는 것은 아주 뜻밖의 일이었고, 서로는 서로를 이미 반쯤 잊은 후였다.


이번에는 b가 a를 먼저 알아봤다. b는 깜짝 놀라서, 성큼성큼 a의 주변으로 걸었다. a의 테이블을 다섯 걸음쯤 남겨둔 순간, b는 a가 이제야 자신의 속도를 찾았다는 것을 느꼈다. 찰나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서는 자신의 속도가 지금 a의 속도에 비해 너무 빨라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b는 지금 자신의 속도대로 한 박자 빠르게 a를 떠났다.

b가 자신을 향해 걸어온다는 것을 a는 한 박자 늦게 알아챘다. a는 b의 존재를 느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아무리 기억과 생각의 조각을 맞춰봐도 b와 함께하는 것보다 더 좋은 미래는 없었다. a는 입가에 웃음을 띠며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5

b는 식당을 나와서 곧바로 지하철에 올라탔다. 생각보다 빠르게 출입문이 닫혔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눈물이 쏟아졌다. 그 순간 자신의 옛 모습을 모두 잃었을지도 모른다. 지하철이 끼익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b는 그 따가운 소음과 함께 모든 것이 흐트러짐을 느꼈다.

a는 식당 안에서 온몸이 저릿해진 채로 있었다. b가 자신을 완전히 잊은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a는 b처럼 한순간에 아프지 않았다. 이별의 냉기가 아주 천천히 들어찼고, 다음 날 저녁이 돼서야 겨우 발가락 정도가 얼어붙었다. 내년이면 발목까지 얼어붙을 것이고, 10년이 지나면 머리끝까지 모든 것이 얼어붙어 산산이 조각나고 말 것이다.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숨이 멎지는 않아서 더 쓰렸다.


#99+

속도가 달라서 엇갈렸고, 자꾸만 엇갈려서 운명은 끝이 났다.

11년쯤이 흐른 어느 날 저녁, 가로등 아래를 걷는 그들의 바닥에는 그림자가 없을 것이다. 그제야 완전히 부서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둘은 사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멈춰서, 그래서 속도가 같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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