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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illness Aug 27. 2020

뜸들이기

다리에서 만난 싱거운 남자와 냄비 밥

강을 가로지르는 조붓한 다리 위에 있었다. 자갈에 부서지는 물소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높이서 내리쬐는 햇살이 온몸으로 홧홧하게 끼쳐왔다. 세상은 지나치게 고요해서 큰 폭풍이 불어오기 전날 새벽에 있는 것이 아닐까, 괜한 걱정이 들기도 했다. 다리 위에는 나를 포함한 세 명이 서 있었다. 한 명은 내가 타고 온 택시의 기사 아저씨였고 다른 한 명은 왜인지 싱거워 보이는 내 또래의 남자 여행가였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듯한 아무개는 다리 아래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어찌나 그 시선이 오랫동안 한 방향에 머물던지, 나와 기사 아저씨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용히 그의 눈길을 따라 훑었다. 시선이 도착한 곳은 흐르는 물이 아닌 강 바깥쪽으로 펼쳐진 모래사장이었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는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아주 작은 크기의 텐트가 펼쳐져 있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그냥 텐트였다. 텐트 앞쪽에는 불을 지핀 흔적이 있었고, 나무 사이에 걸어둔 빨랫줄에는 후줄근한 옷 몇 벌이 간신히 매달려있었다.


다리에 서 있는 세 명의 남자는 몇 분이고 다리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그중 두 명은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 텐트로 시선을 돌린 것이고, 남은 한 명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 보였다. 곧 집중을 잃고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멍한 상태로 있었는데, 텐트의 지붕에서 약한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은 다시 한 번 다리 아래쪽으로 고정되었다. 바닥에 박아둔 폴대가 조금씩 들썩였고 드르륵 지퍼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좁은 틈 사이로 옅은 햇빛이 들어찼다. 텐트 안에는 이제 막 일어난 듯한 여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싱거운 아무개는 못 볼 꼴을 보인 듯 안절부절못했다. 내려갈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당장에라도 도망갈 준비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땅을 차며 제자리를 빙빙 돌다가, 머뭇거림의 끝에선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 시선은 다시 다리 위쪽으로 옮겨왔다.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질문이 쏟아져 내렸다.

'둘이 연인 사이인 걸까?',

'그렇다면 어제 새벽에 한바탕 싸우기라도 한 걸까?',

'연인 사이가 아니라면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

 '혹시 그 반대는 아닐까?'

.

.

.


내가 생각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싱거운 남자는 천천히 내 옆으로 걸어왔다. 입안까지 질문이 차올랐지만, 간신히 삼켜내었다. 먼저 질문을 꺼낸 사람은 도리어 그 남자였다. "내려갈까?" 앞뒤를 다 잘라낸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내려가지 말라고 답했다가는 평생 그 둘 사이에 얽힌 사연을 알아낼 수 없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늦지 않게 서둘러 내려가라고 그에게 말했다.


우리의 말소리가 들렸는지 텐트 안에 있던 여자는 다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붉어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서 하얀 식빵에 딸기 잼을 바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원래 모습이 너무 맹맹했기 때문이다. 당황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얼른 내려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서너 번 주먹을 불끈 쥐더니 풀숲을 헤치며 다리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넘어지고 말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싱거운 아무개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나를 쏘아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웃음을 터뜨리지 않는 사람은 지구 상에 없으리라.


온몸에 흙이 잔뜩 묻은 그를 보고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는 또 한 번 얼굴이 붉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모습이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그녀는 텐트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그를 골려줄까 하다가 간신히 참았다. 둘의 대화는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사랑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대화의 끄트머리쯤에그의 표정이 약간 얼어붙기도 했는데, 그래서 그것은 더 사랑이었다.


다리로 다시 올라온 그의 얼굴에 웃음은 없었다. 그렇다고 시련 같은 쓰린 것들이 묻어있지도 않았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그의 표정을 살폈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이번에도 그였다. "완전히 아닌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지금 다 되는 것도 아니야." 나는 잠시 그 말의 뜻을 생각하다가 그알겠다고 답했다. 알다가도 몰라서 사랑이라는 말 할까 했지만, 그 문장 너무 뻔한 것이어서 하지 않는 편이 나아 보였다. 휴대전화를 켜보니 어느새 1시가 넘어있었다.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하기에 알겠다고 말하고 그를 따라나섰다.


택시를 타고 한참 달려서 다시 시내로 나왔다. 시내라고 해봐야 모두 단층 건물뿐인 조촐한 시골 마을이었다. 중심가 모퉁이에 변변찮은 싸구려 스페인 식당이 보였다.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그런 종류의 식당이었는데, 그가 고향 음식을 먹고 싶다고 졸라대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계산대 위에는 큼지막한 스페인 국기가 거꾸로 걸려있었다. 메뉴판을 몇 번이나 뒤적이다가 그나마 만만해 보이는 파에야를 시켰다. 1시간이 넘게 걸려 테이블로 올라온 파에야에서는 사프란이 아닌 강황 냄새가 진동했다. 하긴 기대한 내가 바보다.


싱거운 그와 미지근한 내가 볼품없는 음식을 앞에 두고 고전하는 사이, 주방에서 '치익' 하고 김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울 자취방에 들여놓은 압력밥솥 소리와 퍽 비슷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뭐가 그리 재밌느냐고 그가 물어서, 압력밥솥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굳이 왜 압력밥솥을 써야 하냐고, 그냥 냄비에 밥을 지으면 안 되느냐고 묻는 말에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란 것을 설명해야 했는데, 냄비에 밥을 짓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서둘러 인터넷을 뒤져서 냄비 밥 짓는 방법을 찾았다. "쌀을 씻고 물에 잠시 불려두었다가, 동량의 물을 넣고 센 불에서 끓여. 그다음에 뚜껑을 덮고 약한 불에서 10분간 익히고, 불을 끈 다음에는 10분 동안 뜸을 들이면 돼. 봐, 복잡하지?" 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뜸들이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뜸을 들인다'라는 말을 설명하는 데는 꽤 애를 먹었다. 평생 생쌀 한 톨도 만져보지 않은 그에게 뜸들이기란 너무나 낯설고 먼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밥에 관련된 이야기가 이어졌고, 대화의 말미쯤에서는 싱거운 그의 모습이 흰 쌀밥과도 꽤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 식당에서 카레밥을 먹으며 냄비 밥에 관한 설명을 하다 보니, 식당에서 나왔을 때는 벌써 4시가 넘어있었다. 해는 반 정도 기울어져서 사진을 찍기 딱 알맞은 빛이 온 세상에 너부러졌다. 그는 슬그머니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했다. 곧 있으면 마지막 버스가 떠나기 때문일 것이다. 아까 다리에서 봤던 그녀는 어떡할 것이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이번에도 질문을 삼켰다. 뜸을 들이는 중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밥에 뜸을 들이는 시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일 수도 있겠다. 주린 배는 등에 붙었을 것이고, 무기력한 상태로 그 시간을 그저 견뎌낼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뜸들이는 시간이 없다면 맛있는 밥은 절대로 지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뜸들이기는 더 고통스럽고 잔인하다.


그의 짐을 반씩 나눠 매고 버스 터미널로 걸었다. 터미널에는 버스가 유난한 소리를 내뿜으며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짐칸에 짐을 모두 싣고, 나중에 또 보자는 인사를 나눴다. 다리 위에서 처음 만난 우리 사이에도 뜸들일 시간이 필요할 테니, 이 정도에서 헤어지는 것이 알맞다. 버스가 매연을 내뿜으며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버스 앞으로 펼쳐진 해지는 풍경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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