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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진 Jan 05. 2024

아빠와 팔씨름

하늘

초등학생 때부터였나,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넘치는 에너지가 주체가 안되던 시절에 아빠랑 종종 팔씨름을 하곤 했다. 당연히 이길 수 없는 경기였지만 아빠는 좀 넘어가 주며 “허허” 하고 웃었고, 나는 조금만 힘을 내면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힘을 줬다.


누나들보다도 키가 작았던 나에게 아빠는 엄청 커 보였다. 키도 크고 힘도 세고 못하는 게 없었다. 내가 정글의 법칙을 재밌게 보고 집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하면, 여름휴가 때 나무와 모기장으로 뚝딱뚝딱 집을 만들어 주셨다. 옆에서 거들던 나는 얼마나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상상이 현실이 되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휴가 때 텐트나 직접 만든 집보다는 편한 숙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씩 생겨났다. 아빠한테 해달라고 하는 일보다 내가 직접 하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만 같던 팔씨름이 더 이상 전처럼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였나, 아무 생각 없이 했던 아빠와 팔씨름을 이겨버려서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 번 아빠를 팔씨름으로 이긴 후로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마냥 이기고 싶었던 예전과 달리 묘하게 기분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키가 자라고 힘도 세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바쁘게 배워나가는 나와 달리, 아빠는 그대로인 것 같았다. 어쩌면 더 약해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번달 생일엔 가족들과 기분 좋게 저녁을 먹었다. 아빠는 해마다 그랬듯이 봉투에 용돈과 함께 편지를 써서 주셨다. 그런데 이번엔 웬 사진이 한 장 붙어있었다. 자세히 보니 6~7살쯤 돼 보이는 내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동안 아빠 지갑에 들어있던 사진인데, 왜 넣어두지 않고 붙여서 줬냐는 질문에 아빠는 이제 줄 때가 된 것 같다고 하셨다.


원하지 않아도 시간은 흐르고 누군가는 자라나며 누군가는 늙어간다. 한없이 행복한 순간을 영원히 붙잡을 순 없지만, 흐름에 맞춰 보내 줄 준비를 하기도 하고 나아갈 준비를 한다. 아무도 원해서 태어나지 않고, 원해서 세상을 떠나지 않는다. 인생의 시작과 끝을 보며 내가 손쓸 수 있는 게 많지 않음을 깨닫는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더 소중하고 아름답기도 한 것 같다. 오늘도 제한된 시간 속에서 영원히 빛날 순간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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