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출신 서울러의 군산 여행기 #첫날
군산시에서 태어나 20년을 살았다. 서울로 진학하면서 지금까지 쭉 서울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5년만 더 있으면 서울에서 산 기간이 고향에서 산 기간을 넘어서게 된다. 늘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며 제법 서울쥐 흉내를 내고 있지만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생각하지 않고 살 수는 없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20년이 되기 전에 할아버지, 할머니도 세상을 떠나셨다. 이제 큰집이라는 게 없어진 상황, 총 40년의 시집살이 중 20년을 청상과부로 지낸 어머니는 고향집을 내놓으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삭 가라앉은 군산시 경제의 상황을 반영이라도 하듯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 값으로 고향에 몸 누울 마지막 공간을 떠나보냈다.
어머니가 서울에 눌러앉기로 결정하면서 자연스레 서울에 있는 아들과 살게 되려는...... 찰나 내가 분가를 결정하게 되었다. 대략 한 달에 20일 정도를 서울에서 지내셨지만 그래도 고향에 내려갈 일이 생기면 고향의 친구들과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를 오가며 바쁘게 지내셨다. 많은 집이 그렇듯 우리도 유산 분배 과정에서 꽤 많은 잡음이 있었고 난 장손이라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아무 발언권도 없이 무안함을 안고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작년은 꽤 힘든 해였고 어머니는 40년의 독박 시집살이 끝에 고향을 등지고 자식들이 있는 서울 붙박이를 결심하셨다.
군산의 집을 비우기 열흘도 남지 않은 상황, 그래도 어렸을 때의 추억이 깃든 곳이니 내가 살며 보아온 곳들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보며 가슴에 남기고 오고 싶었다. 그렇게 3박 4일의 일정으로 군산 여행을 떠났다. 목표는 내가 살아오며 지나간 것들을 모두 훑기, 그리고 즐겨 먹었던 것들 먹고 오기.
2007년에 입주한(이미 나는 서울에 살고 있을 때다) 수송동 한라 X 아파트, 이 집과 비슷한 평형의 아파트를 서울에서 사려면 대략 5채의 값이 필요하다. 그야말로 OTL & OMG.
신포우리만두야 다른 곳에도 지점이 있지만 코흘리개 시절부터 제일 좋아하던 음식이니 고향투어 필수 먹방에 포함시켰다. 만두를 들고 있는 저 아저씨 그림을 그렇게나 좋아했었다. 쫄면과 같이 나왔던 파 우린 국을 그렇게 좋아했었고, 매운 쫄면 양념에 만두를 같이 먹는 것을 그렇게나 좋아했었다. 혼자는 너무 많아서 남김.
바로 추억 남기기를 시작했다. 동선은 맞춰 놓았지만 차 없이 움직일 계획이라 부지런히 걸어야만 했다. 세 번째 살던 집은 우리 가족 최초의 전셋집이었는데 전말은 이렇다. 두 번째로 살던 집(대략 6~9살)이 국민학교(당시)와 거리가 멀어 버스를 타야만 했는데 잘못 내려서 5시간 정도 군산시 한가운데서 미아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이야 이런 작은 동네 아무 데나 걸어도 상관없지만 당시는 8살, 지금도 길눈이 어두워 게임에서도 길을 잃을 지경인데 그 당시는 오죽했겠는가. 어떤 착한 아주머니 덕에 점심때나 돼서야 학교로 돌아갔지만 그때까지 아들이 없어졌다는 전화를 받고 발을 동동 구르던 어머니 심정은 오죽했겠느냐고. 그렇게 급히 학교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현관은 25년 넘게 지난 지금도 반질반질하다. 오후면 얼굴도 모르는 애들이 모여 이 곳에서 팽이를 돌려댔다. 로손(Lawson)이라는 편의점이 최초로 생겨 큰누나가 슬러시라는 것을 처음으로 사준 곳도 이곳이었다.
주말이면 누나들과 비디오가게에 들러 당시 대여료 2000원!! 이나 했던 비디오를 빌려 다 같이 보곤 했다. 영화를 많이 보던 우리 가족에겐 중요한 일과였다. 그 후로 비디오 대여점의 전성기가 오면서 1500원, 1000원, 그리고 500원까지 출혈경쟁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몇십 년 만에 다시 찾은 초등학교는 아직도 그대로였다. 물론 하굣길의 논길이나, 정육점 앞의 잘린 소머리나, 급식 우유와 어묵을 바꿔주던 행상 할머니나, 이제 모두 없지만 그 흔적만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군산 시민문화회관은 많은 추억이 있던 곳이다. 유치원, 초등학교 학예회 때 공연을 하던 곳이고, 큰누나가 데려가서 같이 '돌아온 영웅 홍길동' 만화영화를 보여줬고, 고등학교 때는 군산의 자랑 채만식 선생의 '탁류' 연극을 본 기억이 난다.
지금은 수송동에 밀려 제1 시내의 자리를 양보했지만, 당시 나운동은 내가 군산을 떠나던 그때까지 군산에서 제일 번화했던 동네였다. 산북동, 미룡동, 소룡동 등 크지 않은 군산엔 많은 동네가 있었지만 사실 살면서 별로 가보진 않았다. 심지어 바다 근처에 살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성인이 되어버렸으니.
나운동을 걷다 보니 내가 태어난 동네가 나왔다.
노랑 유치원복을 입고 계단을 올라가며 엄마를 외치던 때가 떠오른다. 사진 한 장에 담기는 이 작은 길가를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었다. 지금은 군산시 전체 직경보다 더 긴 거리를 매일 출퇴근을 하는 나이가 됐지만.
유치원은 교회 안에 있었다. 그래서 유치원생 때부터 반 강제로 교회에 다녔고 고등학교 때까지 신앙생활은 계속되었다. 세례도 받고 나름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하나 싶었지만, 신앙을 잃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 혹시 누가 알까, 나중에 성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고백록이라도 쓸지.
집에 돌아와 하루를 정리했다. 저녁은 어릴 때 최애 음식이었던 군산 발렌타인피자, 치즈는 흐물흐물 늘어지고 맛은 매우 담백하다. 어렸을 때 도미노가 어딨고 피자헛(고3 때 생겼다)이 어디 있었겠는가. 나에게 피자는 오직 발렌타인 뿐이었다. 절반을 해치우고 그다음 날 마저 다 먹었다.
이렇게 군산 첫날 마무리. 짧은 시간에 많은 걸 보았지만,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잊겠는가. 이 곳에 묻히게 될진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많은 추억이 깃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