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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캥 Apr 14. 2020

고향을 떠나며-2

군산 출신 서울러의 군산 여행기 #둘째날

아침잠이 없는 체질은 장점이 많다. 아침을 길게 보내기 때문에 여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식사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으며, 하루를 더 길게 산다는 보람도 있다. 거기에 약간의 오만함은 덤으로.


오만함으로 하루를 시작


다섯 시 반쯤 일어나 둘째 날 아침을 뭐로 할지 생각했다. 한일옥에서 소고기무국을 먹을까, 아님 일해옥에서 콩나물국밥을 먹을까. 사실 일해옥은 좀 생소한 편이고 한일옥은 다음날에 내려올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었기에 콩나물국밥을 먹기로 결정했다. 사실 이런 건 술 마시고 먹어야 제맛이라고는 하지만... 술을 못 마시니 해장이 어떤 기분인지도 잘 모른다. 일단 맛있으니까 됐어.


주량에 대한 소회는 아래 링크로,


일해옥의 콩나물국밥, 밥을 토렴해서 나오고 담백하다. 반찬이 짭짤해서 잘 어울린다.


배도 부르고 소화시킬 겸 바로 걷기 시작했다. 코로나의 여파로 운동을 두 달 넘게 하지 않은 데다가(아주 좋은 핑계다) 어제 너무 많이 걸어서 그런지 무릎이 매우 아팠다. 오후부터는 차를 이용하기로. 


군산중학교


걸어서 모교인 군산중학교에 도착했다. 삶에서 가장 즐거웠던 때가 있다면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있는 지금의 30대 시절과(지나치게 자유로워서 그렇지), 바로 중학교 시절일 것이다. 아버지는 평생 바라던 교수직에 임용되었고, 누나들은 전교, 전국권에서 놀다가 서울로 진학하였으며 군산에서 꽤 넓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고 가족의 자랑이었던 아버지는 중학교 졸업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가장의 죽음은 남은 가족 모두가 처음 경험하는 일, 그렇게 우리 가족은 이때를 기점으로 몰락.... 이 아니라 그냥 지금도 여전히 잘 자리 잡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인생이 그렇게 반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뿐. 그것을 잘 극복했는지 아니면 상처가 남아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만약 의식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남아있다면(그걸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 불렀지), 아마 이때의 기억들로 꽉 차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주변에 개들이 막 돌아다닌다. 풀어 놓고 키우나 보다.


옆의 오르막길을 올라 월명공원 쪽으로 향한다. 아버지와 주말에 종종 산보를 하던 곳이다. 근처에는 청소년수련원이 있고 주말에 자전거를 타고 와서 도서관을 이용하곤 했다.



들어가서 공부했던 곳도 둘러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코로나 시국, 수련원은 격리시설로 이용되고 있었으며 트럭이 도시락을 배달하고 있는 중이었다. 


월명공원


월명호수, 학창 시절에 소풍장소라고는 월명공원, 금강하구둑, 은파유원지 뿐이었다.


한창 걷고 나니 벌써 점심이 되었다. 점심으로 정해놓은 것은 이성당 햄버거, 보통 이성당에서 유명한 것은 단팥빵과 야채빵이지만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것은 바로 햄버거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패티에 피클, 그리고 계란 프라이가 들어있는 전형적인 옛날 햄버거이다. 여기에 우유맛 대신 좀 싼 맛이 나는 추억의 밀크셰이크는 최고의 궁합이었지. 역시 덩어리 진 밀크셰이크는 잘 안 빨려야 제맛이다.


이성당 햄버거, 그 때의 맛을 추억하기에는 사실 기억이 잘 안난다. 밀크셰이크는 확실했지만.


사실 햄버거라는 게 90년대 군산에선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 당시 햄버거를 먹고 싶으면 이렇게 빵집 햄버거를 먹든지, 아니면 아버지를 졸라 꽤 거리가 있던 패스트푸드점에서 먹었으니 이름이 '빅웨이'라는 패스트푸드점이었다. 


군산의 유일한 패스트푸드점이었던 빅웨이, 지방에서 서울로 지점을 확장한 특이한 곳이었다.


그 후로 6학년 때 롯데리아가 처음으로 생겼고.... 그걸로 끝이었다. 20살이 될 때까지 아무 브랜드의 패스트푸드점도 생기지 않았다. 피자헛이 19살 때 생겼으니.. 프랜차이즈가 들어오질 않으니 그야말로 군산은 이름없는 소규모 가게들의 춘추전국시대였다. 혹자는 획일화된 브랜드 피자나 햄버거가 아닌 고유의 운치있는 맛을 가진 음식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그런 거 없다. TV에서 나오는 브랜드 피자 광고는 그저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었다. 지금이야 맥도날드도 있고 버거킹에 써브웨이까지 있지만 당시에는 롯데리아만 먹을 수밖에 없었다. 맛도 없는 걸 오래도 먹었지.


점심을 먹고 전학 가서 졸업까지 했던 초등학교를 찾아갔지만 경비원의 섬뜩한 눈길에 들어가질 못했다. 코로나 시국이라 학생도 없는 초등학교였는데 보안은 철저했다.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 몇 년 전에 방문했을 때는 아예 입구에서 차단을 당했다. 흉흉한 세상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평범하게 생긴 미혼인 30대 남자가 마스크를 낀 채로 초등학교 정문을 들어가려 한다-"


이보다 학부모를 걱정시키는 스펙의 정체불명의 남성도 없을 거야.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나도 누군가에 위협적일 수가 있구나. 


군산고등학교


그래서 포기하고 또 다른 모교, 군산고등학교에 갔다. 건물도, 넓은 운동장도 그대로다. 2, 3학년 때는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오전 6시 점호 후 운동장을 한 바퀴 걷는 게 워낙 고역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던 苦3 시절, 어떻게 그 시절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군산고등학교 기숙사


내가 지냈던 방은 1층이었다. 사감실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배달음식을 시킨 걸 적발될 경우 호되게 두들겨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친구들과 돈을 모아 시켜먹었다. 뼈가 남으면 안 되기에 순살치킨만 먹었고, 다들 용돈이 넉넉한 건 아니었기에 치즈피자만 시켜먹었다. 새벽 1시에 먹는 야식은 그대로 살로 갔지만, 즐거움도 같이 남았기에 문제 될 건 없었다. 


난 초자연적 현상을 믿지 않는다. 따라서 기적이라든지 신적 존재에 대한 입장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기숙사에서 실제로 귀신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자면, 새벽에 목이 말라 식당에 있는 정수기로 가는 길이었다. 노란 우비를 입은 꼬마가 지하 계단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본 것이다. 당시에는 졸리기도 하고 사감 아들인가 하는 생각에 별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감은 총각이었다. 더군다나 새벽 2시에 꼬마가 고등학교 기숙사를 돌아다닐 이유도 없고. 더 충격이었던 건 그것을 본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만약 같은 날에 두 사람이 봤으면 실제로 존재하는 꼬마였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 말고도 꼬마 귀신을 본 또 다른 사람은, 바로 작년에 졸업한 선배였다. 즉 내가 노란 우비를 입은 꼬마를 보기 1년 전에 같은 장소에서 이미 먼저 본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섬뜩.


지금도 돌아다니고 있으려나.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마지막으로 묘에 다녀왔다. 납골묘에는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잠들어 계신다, 그리고 우리 강아지도. 드라마에는 묘 앞에 술을 뿌리며 잘 지내고 계세요 아버지, 또는 여자를 데려와서 소개해 드릴게요 아버지, 이런 상황이 자주 연출되지만 실제로는 그런 거 없다. 그냥 주변에 쓰레기나 줍고 조화나 다시 꽂아놓으며 몇 번 바라보다가 돌아가는 게 전부다. 가슴이 찡하거나 그런 것도 없다. 좀 씁쓸하긴 하지만.

 

이 산은 내 소유라네.


돌아다닌 시간만큼, 추억도 같이 곱씹다 보니 둘째 날도 즐겁게 지나갔다. 혼자 돌아다니는 시간은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내려오기 전에 들를 곳은 둘째 날에 다 들러버렸다. 군산에서 유명한 영화거리라든지, 일본식 가옥이라든지 하는 명소들은 살던 시절에는 알지도 못했던 곳들이었다. 어디까지나 이번 여행의 목적은 살아온 흔적을 더듬는 것, 이것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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