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를 세 번 경험한 자
이것은 꽤 오래전에 정리했던 글.
세상에는 부모가 모두 생존해 있는 사람도 많지만, 뭐 한 명 없을 수도 있고 조금 더 나아가면 두 명 다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당연히 그게 그네들 잘못은 아니지. 부모는 당연히 오래도록 사랑을 주는 존재라고 생각했고, 둘 중 한 분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건 먼 훗날 일이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딱 15년 동안.
2000년 5월, 중학교 3학년 스승의 날 전, 담임선생님이 내게 아버지의 1일 교사를 부탁하였다. 대학 교수였던 아버지가 1일 교사를 하는 것이 애들에게도 매우 유익한 일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스승의 날 전에 아버지는 심한 감기에 걸렸고, 결국 우리 반만 다른 프로그램으로 스승의 날을 보냈다.
아버지의 감기는 나을 줄을 몰랐다. 아버지는 웃으면서 '이렇게 아파본 적은 처음이다'라고 말했지. 내가 좀 더 나이가 있었다면 그 말을 들었을 때 약간 섬뜩함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내 관심은 얼른 숙제하고 게임이나 하고 싶은 생각뿐. 아버지의 감기는 점점 더 심해졌다.
병원에서는 폐렴 같다고 하고 일단 입원을 시켰다. 몇 달 후에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자 익산에 있던 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받게 되었고, 거기서는 서울대병원에서 진단을 받으라고 했다. 결과는 악성 임파종 말기, 남은 기간은 6개월이었다.
암이라는 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린 당시에도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니 쉽게 믿을 수가 있나. 말기라는 것은 가족 중에서 어머니만 알고 있었다. 아마 아버지 당신도 몰랐을 거다. 꾸준한 항암 후 완치될 것으로 생각했고 어머니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
가을이 되자 어머니는 짐을 싸고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 서울대병원에 입원시켰다. 당시 큰누나와 작은누나는 모두 대학에 진학하여 사당역 근처에서 전세를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집에서 혜화역을 오가며 간병을 시작했다.
문제는 고향에 남은 나. 조부모님이 주일마다 교회에 데려가고 할머니가 집에서 숙박하며 밥을 차려 주셨다. 그런데 사실 혼자 있는 게 너무나도 좋았고 사춘기 시절에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아들이 가장 필요했던 시기의 아버지에게, 아들은 멋지게 반항기로 보답했다. 혼자 있던 기간에 누리던 자유는 투병 중이던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는 별개의 일이었기에, 너무나도 잔인한 그 당시의 내 모습을 생각해보면 내가 향후에 자식에게도 같은 대접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소름이 돋는다(미리 각오해둘까..). 가지는 꿈보다 후회가 많아지는 것이 성인이라고는 하지만, 내 삶에 있어 가장 큰 후회이자 아픈 기억이다.
항암은 오래가지 않았고 다시 퇴원, 중학교 졸업시험을 볼 때까지 아버지는 고향에 있었다. 의사의 말로는 병세가 호전되었다고 했었다. 졸업시험을 보고 귀가한 날,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식탁 위에 아버지의 편지 한 장이 있었다. 내용은 다시 서울대병원으로 간다는 것. 며칠 후에 다시 본 아버지의 머리는 약간 자라 있었다. 투병의 아이콘인 민머리에서 약간 잔디가 자라니 당시는 그저 보기 좋을 뿐이었다.
사실은 항암제조차 몸에 듣지 않는 거라는 걸 의미하는 거였지만.
3일 전, 큰고모가 찾아왔고 동생 앞에서 우는 아버지를 봤다.
2일 전, 큰집을 찾아갔고 할머니를 끌어안고 우는 아버지를 봤다. 할머니는 괜찮아 하며 아버지를 안았다.
당일,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머니는 지쳐 침대에 머리를 묻고 졸고 있었고, 아버지는 누워있었다.
나름대로 평범한 하루.
오후 5시, 갑자기 의식을 잃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5분 만에 왔고(지금 생각해도 그 시간에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닌데..) 할아버지는 내가 지금 죽을게, 내가 지금 죽으마 대신 네가 살아라 라고 절규하셨다. 아버지는 잠시 동안 의식을 회복했다. 회광반조, 촛불은 꺼지기 전에 제일 밝게 타오른다.
거의 50년 간 바라본 아들을 눈 앞에서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 뒤로도 15여 년을 더 사셨지만 그 시간에도 마음속 응어리를 풀지 못한채 떠나셨을 거다. 하물며 평생을 살을 맞대고 지금을 살고있는 어머니는.
만 15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다. 그 첫 사람이 아버지였고. 아 죽은 사람은 눈을 스스로 감을 수가 없구나. 만지는 대로 눈꺼풀이 그대로 멈추어 있는군.
사람은 숨이 멎어도 청각은 최후까지 남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 물론 그 당시엔 몰랐으니 마지막 작별인사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려보니 난 띠 두 개 달린 인생 첫 완장을 차고 있었다. 애초에 상복도 처음이었네.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도착하기 시작하고 뭘 해야 되는지도 몰랐다. 조문이 제대로 진행될 리 만무했다.
누나들이 오고 같이 울고.
잠이라도 자면, 그리고 깨면 상황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기적 같은 건 일어나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도 잊을 지경이었다.
산 사람은 또 살아야지. 매일같이 간절히 바라면서 잠들었고, 매일 설마 설마 꿈이지 않을까 하며 깨어났다. 슬픈 것은 가족의 몫, 남들에게는 그저 다른 사람의 죽음일 뿐이었다. 현실을 바꿀 수는 없으니 현실을 보는 눈을 바꿔야 했다. 그렇게 한 달 후, 미소 띤 사진 한 장 없이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 이후 머릿속 아버지의 기억은 3:7 가르마를 단정하게 탄 그 모습.
그리고 2020년 현재, 20년이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장황하게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굳이 끄집어내긴 했지만, 사실 내 삶 중에 있는 큰 사건 중 하나였을 뿐, 살아오는 데 별다른 영향을 주진 않은 것 같다. 그 뒤로 할아버지, 할머니를 떠나보내며 두 번의 상주를 더 지냈다. 그리고 '불효' 하지 않으려면 먼 미래(정말 멀었으면 좋겠다!) 어머니의 상주까지 총 4번의 상주를 지내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왔다(그것도 넉넉하게).
금전 걱정 없이 대학원까지 마쳤고, 괜찮은 직장을 얻어 안정적인 삶에 여유로움을 더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가끔 내가 잃은 것에 대해 생각한다.
아버지의 등을 밀어드린지 20년이 되어가고, 역시 내 등을 내가 직접 민 기간과 같다.
살아온 추억만으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하는데, 만든 추억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앞으로 함께 할 추억, 시간을 잃는 것이다.
죽음과 이별을 이른 나이에 눈 앞에서 마주한 경험 때문일까? 어떤 죽음에는 의연해지고 또 어떤 죽음에는 나의 일처럼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죽음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오다 보니 나 자신 삶의 진행 방식에도 약간 너그러워진 것 같다. 열심히 활동하는 것도, 때로는 멍하니 있는 것도 살아있기에 할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이다. 물론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경험하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결국 찰나의 행복을 위해 사람은 고달픈 일상을 견뎌내는 것, 나 자신이 (타인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지금 행복하다면 그 어떤 행위도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거겠지.
하지만 나에게도 죽음이 닥쳐온다면 의연하게 행동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럴 땐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말을 떠올린다.
'인간을 괴롭히는 건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에 대한 판단이다'
이것을 좀 더 응용하면,
'죽음이란 건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죽음이 무섭다는 생각이 사람을 무섭게 하는 것이다.'
무서울 여유도 없이 행복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살고 있다. 스스로 삶의 방향키를 쥐고 있다는 것은 멋지면서도 외로운 일이다. 내가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직도 요원한 일이지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자식에게 추억이 모자라게 하는 일이 없도록 충분한 행복을 가지고 살며 준비하고 있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