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같이 살던 작년 이맘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새벽에 문득 잠이 깼다. 안방에서 흐느끼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가 같이 들렸다. 몽롱한 가운데 무슨 소리지 하는 찰나, 어머니가 방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얼른 짐싸서 내려가자! 할머니 돌아가셨단다!"
조만간 오리라 생각했던 날이 생각보다 좀 빨리 왔다. 아 세번째 상주 역할 시작이구나.
서울에서 고향까지 거리는 2시간 반 남짓, 어머니는 내려가는 내내 울며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돌아가셔 버리면 어째, 이제 좀 사랑하고 사랑받는다 싶었는데 어째 이러시면서.
40년간 모시면서 어머니가 가장 미워한 여자는 당신 시어머니요, 가장 사랑했던 여자는 내 할머니였다. 반대로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어머니는 "세상에 남은, 유일하게 날 사랑한 남자가 떠났다"라고 말씀하셨다(그럼 나는!).
할머니 장례 내내 어머니는 통곡했다. 물론 남편이 떠나갔을 때처럼 중간에 혼절하고 그러시진 않았지만 시어머니의 죽음 앞에 이렇게 슬퍼하는 모습은 나에게는 좀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애증'이라는 것이 극대화된 것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저것은 진짜 사랑이 싹튼 것인가, 아니면 그루밍의 일종인지 혼동됐다.
아버지는 여자 형제가 넷이었고, 어머니는 남자 형제가 넷이었다. 우연치고는 신기한 조합이지만 이 둘은 꽤 잘 어울렸다. 한 성질하는 아버지는 외삼촌들(평균키 180cm 이상) 앞에서도 기가 죽지 않았고, 그보다 두 성질 더하는 어머니도 고모들 앞에서 기가 죽지 않았다. 3은 1보다 큰 법, 어렸을 때부터 가장 많이 본 광경 중 하나는 늘 어머니에게 바가지를 긁히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학업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성공한 아버지는 가정에서도 따뜻하고 인자한 아버지였지만 유독 고부간 관계 유지에 대해서는 거의 얼간이같은 균형감각을 보여줬다. 이 시대 아버지들이 다 그랬다.
누나들이 늘 내게 하는 말이 있다. 부모와 아내 간 균형같은 건 잡을 생각은 아예 버리라는 것, 같이 사는 것도 아내요, 같이 늙는 것도 아내이니 아예 한쪽(부모님)을 서운하게 하는 걸 감수하라는 것이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쉽지 않다고 해도 감당해야 할 일이라 했다.
금지옥엽같은 막내아들의 삶에 비해, 어머니를 지켜보며 자라온 두 누나들은 생각할 점이 좀 많았을 거다. 시집살이의 시작은 그래도 세상이 좀 바뀌었으니 예전보다 낫겠지 하는 자세로 임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시댁은 시댁, 결혼 후 첫 명절에 누나가 들은 말은 "첫 명절은 친정가는 거 아니다"였다. 한성질하는 아버지, 세성질하는 어머니, 그리고 2.5성질 정도 되는 큰누나. 그렇게 큰누나는 당당하게 친정으로 왔다. 전투력 측정기로도 측정이 불가능한 성질의 작은누나의 명절도 기대됐지만 외국에 살아서 볼 기회가 없다. 한편으론 다행이다.
첫 명절, 어찌어찌 친정에 오는데 성공한 누나의 모습
어렸을 때, 여느 부부들처럼 부모님도 부부싸움을 했고 대부분 큰집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워낙 어렸을 때니까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린 내게 부모가 싸우는 것 자체는 꽤 스트레스였고, 난 결혼하면 안 싸울 것 같은데 왜 저리들 싸우실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머니는 울분을 못 참고 가끔 심한 말을 쏘아붙였는데 아버지는 그냥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명절 연휴 내내 어머니는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명절 당일에 고모들이 오면 식탁에 모여앉아 얘기를 나눴다. 앉아서 웃고 떠드는 고모들을 배경으로 옆에서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큰 집에서 가장 많이 본 광경이다. 물론 고모들도 시댁에 가면 며느리 노릇을 하겠지만 삼 남매가 보기에는 꽤 불편한 장면은 분명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가 든 고모들이 같이 일을 거든 적도 있었지만, 친정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에게는 묵묵히 일을 하고나서 다음날 찾아갈 친정이 없어진지 이미 오래된 상황이었다.
제사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실 적엔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모셨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 고집으로 다시 제사를 지내게 됐는데 이미 40여 년간 모신 제사라 그런지 어머니도 뭐 까짓거 하지 이런 마음으로 제사상을 차렸다. 제사를 모실 남자는 이제 남지도 않았는데(난 서울에 있었다).
어머니가 살면서 가장 크게 화를 냈던 때는 아버지 투병중에 큰집에서 제사 준비하러 오라고 했을 때였다. 어머니는 미련한 늙은이들이 산사람이 죽어가는데 이게 뭔 X같은 짓이냐고 거의 반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지르고 울부짖었고, 아픈 아버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누운 채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다. 아마 이때쯤이었던 것 같다. 제사는 그저 인습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 것은.
최근, 어머니가 갑자기 식사 중에 기도를 하자고 했다. 밥먹을 때 기도한 적 없는데 뭔 일이냐고 묻자 그동안 증조부 제사를 모셨는데 이제 할머니도 돌아가셔서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기도로 대신하잔 말이었다. 제사지내야 된다고 우기는 어른도 이제 없는데 아직 세뇌가 덜 풀린건가. 나는 엄마도 나도 얼굴도 본 적 없는 조상 제사 어른들 살아계실 적 40년간 지냈으면 됐지 이런 시팔(이건 맘속으로 말했다) 뭔 말도 안되는 짓거리냐고 화를 냈다. 앞으로 영원히 제사지낼 일 없고 아버지 기일도 모여서 밥 한번 먹는걸로 끝내자고 말했다. 안좋은 굴레는 우리 대에서 끝냅시다. 밥도 해먹지마 걍 사먹어.
우리 집의 모든 제사는 할머니까지 돌아가시면서 비로소 완벽하게 끝났다. 이제 영원히 병풍을 세우고 향을 피워 젓가락을 세번 두드려 반찬에 얹고 두번 절을 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모일 일도 없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의식이 가물가물한 할아버지 곁에서 어머니는 말했다. "아버님, 고생 많으셨어요. 우리 애들 잘 챙겨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애들 데리고 행복하게 살게요.", 그리고 할머니 장례식 때 어머니는 말했다. "어머니 천국 가세요. 그동안 너무너무 감사했어요."
어머니는 본인의 '며느리'로서의 자부심이 엄청났다. 남편 없이도 20년 동안 딴생각 안하고 충실하게 시부모님을 잘 모셨다는 자부심이었다. 할머니의 폰 단축번호 1번은 며느리였고 딸은 2번이었다. 말년에 할머니는 며느리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살았으며 잠시라도 연락이 안되면 안절부절못했다.
어느 날,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애미가 연락이 안된다. 이렇게 연락이 안 될 리가 없는데 분명 어느 놈이 납치라도 한 거 아니냐"
"뭔소리예요 할머니 뭐 가져갈게 있다고 누가 우리 엄말 데려가요(지하철에서 노인네들에게 데이트 신청받은 게 내가 들은 것만 5번은 되지만), 찜질방 갔겠지"
"아니다, 지금까지 내 전화를 이렇게 안 받은 적이 없었어, 빨리 경찰 불러야겠다."
"아 진짜, 일단 그냥 계세요, 분명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실제로 어머니는 찜질방에 있었다. 전화를 못 받은 것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다.
시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나니, 이제 어머니는 자손들이랑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다. 문제는 당신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어른'이 이제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부의금 나누는 순간부터 고모들과 마찰이 생겼고 유산도 마찬가지였다. 각자 손님으로 온 건 나누면 되었지만 문제는 할머니 개인에게 온 부의금이었다(ex 교회 사람). 어머니는 할머니의 장손인 내가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고 n번째 고모는(다른 고모들은 가만히 있었다) 할머니의 딸인 자기들이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n번째 고모는 딸들이 결성한 계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면서 왜 받으려고 하냐고 윽박질렀고, 어머니도 지지 않고 맞섰다. 애초에 자기들끼리 챙기려고 결성한 계에 참여하는 것도 웃기지만 자매들끼리 계에 올케가 참여해봤자 돈만 내고 받는 건 없을텐데, 결국 할머니 개인 손님은 내가, 교회 사람은 고모들이 받는 걸로 정리가 되었다. 내 생애 가장 긴장되던 시간.
아이러니한 것은 유산 정리라는 게 결국 고모들의 이해심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던 일이라는 것이다. 법대로 N빵을 했으면 그대로 나누면 될 일이었지만, 결국 장손인 내가 조금 더 지분을 가져가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더 많이 받지 못했는데 그래도 나눌 건 나눠야 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그것이 분했다. 40년 간 이 집에 시집와서 고생했던 나에게, 그리고 서방 없이 20년 간 느그 부모님을 성심껏 모신 나에게(그리고 내 아들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는 생각. 그러나 이 소회는 결국 감성적인 접근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들'이라서 가능했다. 내가 딸이었으면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과 지원을 이렇게까진 받진 못했을 거다. 그리고 어머니도 며느리의 입장에서 시부모님의 챙김을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고, 유산 정리도 진짜 N분의 일 토막이 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씁쓸한 현실이다.
할머니는 생전에 내가 태어났을 때 얘기를 자주 하셨다. 손녀 둘을 내리 본 후 고대하던 손자를 처음 안게 되었을 때 얘기다. 어느 날 온 가족이 있을 때 여느때처럼 그 얘기를 하시던 할머니, 뜬금없이 옆에 있던 작은누나를 보고 하시던 말이,
"네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서운했는지 모른다."
면전에다가 대고 축복의 순간을 부정한 할머니도 할머니지만 그것을 대응하는 작은누나도 대단했다. 큰 상처를 주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묵묵부답으로 멋쩍게 넘겼다. 내가 아는 그 성질의 작은누나라면 당장 들이받을 법 한데. 나중에 그것에 대해 물어보니 누나의 대답은 간단했다. "노인네잖냐, 뭘 알고 한 말도 아닐거고 그냥 넘기면 되는거야." 둘째 딸로 사는 것은 받아도 되지 않을 상처를 이따금 받고 살아가는 걸 말한다. 그러기에 더 독해질 수밖에 없고.
어머니의 기대와 달리 유산 정리는 내 예상대로 마무리되었다. 갈등 상황에서도 내가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진짜로 법대로 될까봐였다. 그러나 이성과 감성은 다른 법, 원래 어떠한 형태의 마찰이건 앞뒤 안 가리고 가족 편을 드는 게 인지상정이다. 어머니와 나는 같이 고향을 씹는다.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n번째 고모부는 정리 기념으로 큰고모부에게 마지막 말씀을 해달라고 했다. 내가 상주인데 마지막 말을 날 시키지 않다는 것은 이제 장손 대접도 여기서 끝났구나, 모든 것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을 챙기는 어른은 더 이상 고향에 없다, 완전히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후 고향에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서울에 온 가족이 살게 되면서 모든 것은 마무리지어졌다. 사실 이렇게 쓸쓸한 방향으로 끝나리라는 것은 2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부터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나서 고모들은 명절에도 큰집에 오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예견은 확신이 되었다. 어머니만 몰랐지. 할머니 장례식 때 고모들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면 올게 오겠구나 싶었다.
고부 갈등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유교 문화, 자식(특히 아들)을 부모의 또 다른 아바타로 생각하는 동양 문화의 특성과 자유로운 현대 사회의 가치가 충돌하면서 더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 사실이다. 현대 한국사회 발전 과도기라고나 할까. 일편단심 사랑한 내 아들을 왜 내가 한 것처럼 챙기지 않느냐. 많은 어머니와 딸들이 평생을 며늘아기로 살며 아가와 애미와 개년의 경계를 넘나드는 호칭으로 불리며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시월드를 버텨낸 강인한 여인들은 또 다른 시월드를 만들어냈다.
기혼자 친구에게 어쩜 너희 부부는 그렇게 부모님과 잘 지내냐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친구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뭔소리야, 말도 마. 진짜 상상도 못한 걸로 서운해하시는 게 얼마나 신기한데, 결혼하기 전에는 생각도 못했어. 우리 부모님이라고 예외는 아니더라고." 이방인을 가족으로 맞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개인간의 사랑으로만 결혼이 구성되는 것은 아직 이른가 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1년, 최근 어머니의 만 65세 생일이 지났다.
평생 시부모님을 챙기고 살았던 어머니가 자연인이 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국가가 공인한 노인이 되어버렸다.
떠날 사람들이 떠나고 모든 상황이 정리된 지금, 어머니는 남은 자손들과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신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생전에 그렇게 소리지를 일이 많았던 어머니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부터 지금까지 거짓말처럼 언성을 단 한 번도 높인 적이 없었다. 이젠 더 이상 언성을 높일 일이 생길 일도 없거니와, 그렇게 어머니를 사납게 대하다가 말년에 유순해진 할머니처럼 어머니도 그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장례식 날, 어머니는 통곡하는 그 순간만큼은 할머니에게 받은 모든 상처를 잊고 사랑받은 기억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앞으로의 나날을 그렇게 좋은 기억만 가지고 보냈으면 하는 건 좀 뻔뻔스러운 생각일 것이다. 상처는 회복될지언정 흉터는 남는 법이니까.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었을 시점에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친정을 일찌기 잃고 평생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고모들을 상대해야했고, 그리고 일찍 떠난 서방까지 그리워하며 살다가 노인이 되어버린 여인의 삶을, 어찌 사랑과 관심만 받으며 살아온 귀한 장손이 글 몇줄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들이 보기에, 어머니의 지금이 참 행복해 보이면서도 쓸쓸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