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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캥 Mar 24. 2020

영화 '변호인'에서의 실존주의

철학 소고 3

예전에 있었던 일이다. 명절에 TV를 돌리다가 영화 '변호인'의 한 장면을 보았다. 별생각 없이 채널이 머물던 장면은 극 중 임시완이 취조를 당하며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었는데, 곽도원의 질문이 이랬다.

"네 사상이 뭐냐?"



"... 실존주의?"


그 순간, 아 다음 장면에서 엄청 두들겨 맞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뜸을 들인 것으로 보아 최대한 머리를 굴려 두들겨 맞지 않을 대답을 고르고 골라 나온 것이었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면 거짓말하지 말라면서 맞았을 것이고, 사회민주주의라고 했으면 얌마 그건 2003년에 일어날 일이야 하면서 맞았을 것이고, 사회주의라고 했으면... 뭐 안 봐도 뻔하지. 거짓말이 아니면서도 비위를 맞춰야 하며, 또 자기 자신의 생각도 반영해서 고심 끝에 내놓은 대답. 실존주의.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가 실존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사르트르가 주장한 실존주의의 기본 개념이다. 즉, 어떠한 배경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자기 행동의 총합으로만 표현하는 것이다. 플라톤 이래 '모든 존재는 그 본질을 가지고 있다'라는 개념의 전제를 완전히 뒤집는 사상이다. '나'라는 존재는 인종, 성별, 문화를 초월하여 '나' 자신을 우선으로 정의하며, 또한 '나'의 진면목(본질)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나는 나의 행동의 전체로 정의된다. 


자기 자신의 본질은 뒤로하고 현재 자기 자신의 모습이 곧 본질이라는 것은 삶에 있어 무한한 자유가 있는 것과 같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고 표현했는데, 왜 선고냐, 그것은 현존하는 나만이 존재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약한 개인에게는 꽤 부담스러운 일이라 인간은 무한한 자유에 중압갑을 느껴 스스로 외부에 의지하여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결정론, 그리고 종교의 시작이다. 여기까지가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어느덧 리처드 도킨스까지 계보가 이어진다.


문제는 외부에 의지하여 자기 자신을 의식하다 보니, 타인에 의한 중압감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삶의 방향을 스스로 찾지 않고 외부에 의지하면서 인간은 마음의 안정감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적당히를 모르는 종족, 어느덧 세상을 인식하던 개인은 세상에 의해 의식 당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삶의 지침을 외부에 의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간섭을 버티다 못해 인간은 절규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되는데... 사르트르의 작품에 나온 그 유명한 대사가 바로,


<임시완이 여기도 나온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사상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현재를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는, 사상에 구애(拘碍)받지도 않고, 사상을 구애(求愛)하지도 않는 개인일 뿐이다"가 임시완의 정확한 의도였을 것이다.


영화에서 나오진 않지만 곽도원이 이해한 바는 사상의 핵심이 아니라 그 사상가의 배경이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월남전, 알제리 전쟁 등의 모든 전쟁을 반대하였고, 앙가주망에 따른 사회, 정치참여를 권장하였으며, '제도'가 되길 거부하여 노벨상을 반려하였으니 그야말로 '저항'의 아이콘이다. 당시 사회상을 돌이켜볼 때, 이보다 구타에 최적화된 답도 또 없을 것이다. 물론 임시완은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인간임을 표방하고자 그 답을 내놓았던 것이겠지만, 결국 시대를 많이 앞서간 대답을 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결국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주의적 삶은 알아서 채워야 하는 백지와 같다.


아마 '니체의 실존주의'라고 했어도 곽도원이 기독교도였으면 두들겨 맞았을 것이고,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적 단계에 입각한 유신론적 실존주의'라고 했으면 상황이 좀 나아졌을지도.. 그냥 그 자리에서 애국가를 소리 높여 부르는 게 유일한 답이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동작그만


지금, 사람들은 나 자신을 스스로 찾아가는 것을 원하면서도 삶의 방향성을 외부에 의지하는 것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고 '삶의 질'에 대한 인식은 결국 타인과의 비교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상, 완벽한 실존주의적 삶은 스스로의 폐쇄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늘 고달픈 것이며, 이따금 스스로 방향을 찾는 행복을 만끽하며 사람들은 오늘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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