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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권 Feb 12. 2023

사람을 믿는다는 것

사람을 믿는다는 건 신이 주신 정말 아름다운 인격의 모체인 것 같아요.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죠. 그만큼 사람을 믿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내 자존심과 때로는 실패할 확률을 안고 빠지는 일종의 게임과도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새로운 도전에 익숙하듯이 사람을 믿는 과정에서 다소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가끔은 사람으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 그리고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욕심도 믿음이라는 경직되지만 또 우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따뜻함이 배어 있어 내려놓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조직에 몸 담았을 때는 가급적이면 상황을 믿는 것과 사람을 믿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상처를 받지 않는다고 말하곤 합니다. 사실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과 현상을 믿으며 사람에게는 일종의 계산된 언행으로 관계를 유지하라는 얘기이기도 하죠.


사람의 마음과 한 사람의 인격체를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아온 상처의 깊이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내 주변의 사람도 나로 인한 상처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해요. 그게 사람을 대하는 우리들의 기본적 자세가 아닐까요. 아무리 힘들다고 하더라도 놓쳐서도, 그리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게 바로 인간관계 회복을 위한 우리의 노력입니다.


"너 요즘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니니?"


"왜? "


"최 00가 너 얘기하고 다니는 데, 너 조심해야겠더라."


오랜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 목소리에는 내 행동과 또 다른 친구에게 내비친 나의 태도에 관한 우려가 섞여 있었다.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지난주 모임에서 최 00이라는 친구를 부르지 않고 친한 친구들과 저녁 모임을 가졌던 거에 대해서 화가 나지 않았을까, 그 친구가 내 험담을 주변에 하고 있다면 그 원인은 그 정도의 사건 말고는 없었습니다. 아마도, 작은 서운함의 감정이 내가 그 친구에게 대하는 일종의 가식의 가면을 벗겨내는 작용을 했던 것입니다. 


Photo by Paris_shin


나야 뭐 그 정도 가지고 내 험담을 하는 친구가 얄밉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절교할 생각까지 들게 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상대의 감정이 과연 나로 하여금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문제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게 적당한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말 그래도 나도 화난 거죠. 그런데, 계속 이런 불편한 마음을 들고 지낼 수 있을까요. 어차피 마음이 복잡한 건 상대보다는 제가 더 클 텐데 내가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할 필요가 있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선택한 게 그 친구와 저녁식사를 하는 거였습니다. 제가 참석하는 걸 비밀로 하고, 또 다른 친구의 도움을 받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술잔을 몇 잔 기울이면서 저는 그냥 "그땐 미안했어."라고 딱 한 마디만 하고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친구의 마음을 달래주고 싶었고, 내 험담에 대해서는 삭힐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상대와 마주한 자리는 금세 녹아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지금도 그 친구는 무슨 일만 있으면 저에게 상담을 받곤 하는, 저를 크게 신뢰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때 저도 제가 받은 서운함을 친구에게 쏟아 내었다면 과연 둘 사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과정과 결과를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상황의 중요성과 진정으로 내가 얻고자 한 관계의 결과를 잘 파악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위한 가장 좋은 상황의 변화를 이해하는 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가 봐요. 


저는 처음에는 사람을 믿는 것보다 상황을 믿는 게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지름길처럼 말했습니다. 사실 그 부분은 어쩌면 사람을 믿기 위한 상황의 과정을 믿으라는 거라고 보면 될 겁니다. 상황을 이해하고 믿다 보면 그 이야기의 주체인 상대는 자연스레 불신이라는 찌꺼기가 빠져나가는 걸 알 수 있으니까요. 그게 바로 사람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맹점인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는 사람을 잘 믿지 못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대게 사람으로 부터 받은 상처가 있거나, 자라온 환경, 그리고 성격의 차이 때문에 사람을 믿는 걸 어려워하기도 하는데요. 그런 구조 속에서 고통을 받는 건 역시 나 자신이라는 게 정말 나를 힘들게 합니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상대가 나에게 무언가를 말해도 그 의도와 진위에 대해서 관심이 깊었지, 그 사람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자신의 속에 것을 내어 놓는다라고 생각하지는 못했거든요.


나에게 말과 행동은 분명한 의도가 있을 거라는 의구심은 생각만 깊게 만듭니다. 생각에 생각이 더해지면서 세포분열이 일어나듯 적절한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 자체가 이제는 내가 감당이 안되게 만듭니다. 굳이 상대의 말과 행동에서 의식구조를 찾아낼 필요가 있을까요.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적절히 듣고 적절히 대응하는, 그러니까 인간관계에 능한 사람을 보면 가끔은 부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생각의 늪에 빠진다는 게 바로 이럴 때 쓰는 말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일종의 의심이라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건지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건 상대는 나의 의구심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그렇게 피어오른 생각의 태도를 무의식 중에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말하는 게 진심으로 상대를 대하면 상대도 나를 진심으로 대할 거라는 이야기 아닐까요. 자신이 저 라스베이거스의 프로 겜블러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은 생각과 선행학습된 마음의 부적적인 표현물이 말과 행동, 때로는 기운에서 느껴집니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게 어쩌면 당연한 얘기입니다. 무작정 믿는다는 것 자체게 언젠가는 진정으로 믿고 싶지만 믿지 못하게 만드는 상처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요. 그렇다고 우리가 신이 내린 아름다운 정신의 뿌리를 부정해서는 안 되겠죠. 그러니, 너무 급한 마음으로 사람을 사귀고 또 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조금씩 천천히 상대를 알아나가면서 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 사람을 믿음으로 대하게 되는 시간이 찾아오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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