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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우 Aug 30. 2018

아빠는 물건 찾기 대장

나와 아내는 누가 누가 더 털털한가 대회에 나가면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다. 전 세계에서 불법(?) 유통되고 있을 내가 잃어버린 우산만 족히 100개는 넘을 것이다. 아내는 중요한 물건일수록 소중히 모셔두는데, 그 모셔둔 자리를 잊어버려서 결국 잃어버리고 만 물건들은 셀 수가 없다.


결혼하고 나서야 이러한 상대방의 모습을 알게 되었는데, 천성적으로 뭘 잘 챙기지 못하고 맨날 잃어버리는 것을 어찌하겠냐면서 서로를 백 퍼센트 이해하며 잘 살아왔다. 그런데 알고보니 천성이 아니었다. 마치 배우가 자기가 맡게 된 새로운 배역에 충실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듯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며 사는 거나 다름 없지 않을까.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본 심리학 실험 중 기억나는 게 있다. 일반인 수십여 명을 무작위로 뽑은 후 절반은 간수복을 입히고, 나머지 절반은 죄수복을 입힌 후 감옥처럼 만든 세트장에서 며칠간 생활하도록 했다. 단지 역할 놀이에 지나지 않음을 다들 잘 알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간수들은 진짜 간수처럼 죄수들을 감시하고 통제하였으며, 죄수들은 진짜 죄수처럼 간수들을 무서워하며 복종하였다고 한다.


내가 주부로 변신하고 나서 내 새로운 역할에 충실하기 위하여 본래 털털하고 뭘 자꾸 잃어버리는 천성마저 바뀐 게 아닌가 싶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어서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털털한 사람으로 타고났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 것이라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왔는데, 그게 아니었다. 주부로 변신하고 나서 나는 내 물건들을 잘 챙길 뿐만 아니라, 애들과 아내 물건을 비롯한 집 안의 모든 물건의 소재를 다 파악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내와 아이들이 뭘 못 찾겠다고 이야기하면 척척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부피가 큰 것(겨울 외투, 우산, 가방 등)만 찾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연필, 모자, 병따개에서부터 USB, 지우개, 레고 조각 같은 조그마한 물건까지도 다 찾아냈다. 특히 레고 조각 찾아내기 기술은 어느새 경이로운 경지에 도달하였다.

“아빠, 이 레고 머리가 없어졌어.”

“어떤 스타일에 무슨 색깔인데?”

“응, 갈색에 긴 머리야.”

“마지막으로 갖고 놀았던 곳이 어디인지 기억나?”

“음……. 여기 소파 있는 쪽인 거 같은데.”


레고 조각 소재 추리는 항상 마지막 목격 지점으로부터 시작했고, 십중팔구 목격 지점 인근에서 찾았다. 못 찾는 경우에는 평소 가장 많이 출현하는 지점, 또는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되었을 때 찾았던 지점에 가보면 백전백승이었다.


어떻게 나의 털털한 천성이 거의 오타쿠적인 세밀한 성격으로 개조되었을까? 우선 내가 살림을 하면서 집 안의 모든 물건을 관리하니까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회사에서 문서를 화일에 정리하듯 집 안에서도 모든 물건을 나름의 분류법에 따라 관리했다.


일단 물건들은 그 사용법에 따라 일차적으로 대분류했다. 사용법에 맞는 장소에 놓는 것은 기본이며, 물건을 사용한 뒤 원상 복구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집 안의 각종 물건은 모두 다 본래의 위치에 맞게 정리하면 필요할 때마다 쉽게 꺼내 쓸 수 있었다.


가장 많이 쓰는 물건들은 아무래도 애들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애들이 스위스 학교생활 이외에 한글학교를 비롯한 각종 방과 후 활동을 하게 되자, 이에 맞는 준비물들을 챙기는 것도 일이었다. 결국은 모든 방과 후 활동별로 가방을 하나씩 장만하게 되었다. 스위스 학교 가방, 한글학교 가방, 비엣보다우(베트남 무술) 도복 가방, 수영복 가방, 미술학원 가방, 축구 가방 등 애들 가방만 총 12개. 이 모든 가방들을 소파에 내장된 수납공간에 보관하였다. 이렇게 하니까 준비물을 깜빡하는 경우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한번 집 안 물건 찾기 대장이 되니까 스위스에서의 육아휴직이 끝나고 나서도 물건 찾기는 계속 내 담당이 되었다. 이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물건 찾기까지 가능해졌다. 한번은 해변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는데, 둘째 정민이가 수영하다가 모자가 파도에 휩쓸려서 잃어버렸다. 정민이 근처에 아내가 같이 있었지만,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미처 손을 쓰지 못하였다. 정민이가 좋아하는 모자를 잃어버렸다고 울상이 되어서 나한테 왔다.


“아빠, 엉엉……. 아빠가 사준 모자가 없어졌어. 파도가 갖고 갔어.”

“이런, 어쩌지…….”

“아빠는 찾기 대장이잖아.”


하필이면 마침 그날 정민이에게 사준 모자였다. 대충 달래주고 말려고 했는데, 너무 서글퍼하는 아이의 모습에 불타는 부정이 발동하였다.

“알았어. 아빠는 찾기 대장이지?!”


모래 속에서 바늘을 찾는 심정이 바로 이러한 것일까. 아내가 대략 이쯤에서 잃어버렸다고 가리킨 지점에서 반경 50미터 정도까지를 수습 지역으로 결정하고, 바닷속을 헤매면서 수영하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진맥진해가는데, 저기 물속에 거무스레한 물건이 보였다. 바로 정민이 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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