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문을 두드릴 밖에

동네 아주머니들의 체조 타임, 구청 앞 미세먼지 신호등

by 이소

맥없이 멍해졌다. 오늘은 무슨 요일이고 내가 뭘 해야 하더라. 약 3주 정도 준비한 채용절차에서 미끄러지니 그 다음이 생각나질 않았다. 사회적경제 영역에서 좋은 역량을 발휘하는 조직이었는데, 면접에서 떨어지니 아쉽고 내 역량을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그것과 별개로 면접전형 과제를 리뷰해주신 담당자님께 감사를. 면접 과제 수행 후 해당 과정을 리뷰해주셨다. 내가 어떤 점에서 강하고 약한지를 듣는 드문 경험을 했다). 내딴에는 드물게 노조라던가 성평등이라던가, 그런 가치를 내걸고 조직을 이끌어가는 곳이라 더 기대했다.


지나간 건 떨쳐야 한다. 서류작성과 면접 준비를 하며 멋진 조직에서 일하는 나를 꿈꿨다가 다시 눈앞의 현실로 돌아왔다. 초조한 마음에 통장 잔고를 살펴봤는데 아직 버틸 만하다. 뭘 해야 할지 몰라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지만 사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다 들어온 외주 일을 해야 하는데! 일이 잘 안 된다.


줍는 풍경 5: 동네 아주머니들의 체조 타임


어디에서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방 안에만 있다간 마음이 구겨진 종이 쪼가리마냥 오그라든다는 사실이다(엄마와 싸울 확률도 좀더 높아진다). 집 가까이에 있는 성북구청 12층에 자리잡은 이음 도서관에 가서 가서 책이라도 볼 마음에 슬렁슬렁 발걸음을 움직였다.


퇴사하면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이 또래 직장인에서 동네 주민들로 바뀐다. 몇달 전까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쾡한 얼굴로 손에 들린 커피를 마시며 피곤을 쫓는 사람들의 모습이 익숙했다. 지금은 형형색색 꽃무늬의 하늘하늘한 상의를 걸치고 머리에 햇빛 가리기용 모자를 쓴 아주머니들을 본다. 사람들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 대신 텀블러가 들려 있다. 아주머니들은 환경 친화적 생활의 모범을 일상에서 이미 잘 실천 중이다.


이음 도서관의 운영시간이 끝나는 오후 6시. 도서관 밖을 나서면 성북구청 앞 바람마당에 체조하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체조의 배경음악이 흥겨운듯 멜랑꼴리하다. 트로트일까. 장르를 잘 모르겠다. 유튜브 알고리즘 추천에 길들여진 나로썬 이런 때 아니고서야 좀처럼 들을 기회가 없는 노래들이다. 아이돌의 칼군무와 다르지만, 체조를 주관하는 분의 구령에 따라 호흡을 맞추는 아주머니들의 몸짓에서 생활력 가득한 스웨그가 느껴졌다. 내심 흥겹게 몸을 움직이고픈데 출줄 아는 춤이 없다. 유튜브에서 '저스트댄스'라고 치면 나오는 댄스게임 튜토리얼이라도 흉내내고 싶어졌다.


줍는풍경 6: 미세먼지 신호등은 '좋음'

성북구청 앞 미세먼지 신호등은 대부분 미세먼지 농도 '보통'에 해당하는 녹색 표시가 떠 있다. 미세먼지 신호등이 '좋음'에 해당하는 색깔과 표정으로 웃는 걸 처음 봤다. 하늘이 웃고 있는데 내 마음은 왜 이런담.


백수생활 3주차 이후부터는 내 자신이 고민만 잔뜩 하고 놀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일상에 목적이 없으면 벙찐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문제는 꼭 뭔가를 굳이 '왜 해야 하는지' 정말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등등 오만가지 고민에 질식한다. 놀기조차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프리랜서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할지, 아직은 조직을 한번 더 두드려야 할지 방향이 잡히질 않는다. 그래도 이런저런 내 고민을 들어준 사촌언니의 말이 미세하게 힘이 됐다. "계속 여기저기 문을 두드릴 수 밖에 없지.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이야." 너무 겁내지 말자고 다독여본다.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나는 절박한 친구들에 비하면 지켜야 할 게 별로 없다. 그저 시간이 좀 많이 느리게 갈 뿐이다.


좀 속도가 늦을 뿐, 결국 내 길을 찾게 될 거라고 생각하자. 조직에 맞춘 사람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내 삶의 조건을 스스로 만드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이도저도 안 되어도 그 자체로 이미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스스로에게 긍정의 주문을 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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