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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Jun 19. 2020

검도 덕질을 위해 뭐까지 해봤니?

검도 무경험자들에게 검도덕질 경험을 들려준 순간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린다. 시합장 앞. 초초하게 앞선 경기를 지켜보는 나. 보통 시합 전의 나는 거의 70%의 확률로 긴장 상태에 빠진다. 30%의 안 떨리는 날이 분명 있는데, 그 간헐적 담담함의 원인은 아직 밝히지 못했다.


괜히 손에 쥔 죽도를 만지작 거려본다. 긴장감을 가라앉히는 데는 별 소용이 없다. 다리는 점점 굳어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해보지만 힘만 더 빠진다.


그리고 지금. 내 상태는 시합 전에 긴장할 때와 비슷하다. “이제 곧 시작할 거예요. 혹시 궁금한 거나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발표 현장의 스텝 분이 내게 말했다. 그 말에 느슨했던 주의력의 고삐가 조여졌다.


평소라면 청중이라 편안하게 들으면 그만이지만 오늘은 조금 다르다. 이 행사의 발표자가 나이기 때문이다. “운동 덕질 어디까지 해봤니?”라고 누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운동에 대한 경험을 정리해서 발표까지 해봤어.”


의외의 장소에서 열린 시합장



화상채팅 서비스를 활용하는 화상 발표회의 현장. 눈앞의 노트북 화면을 봤다. 화상회의 애플리케이션 Zoom을 실행한 상태로 발표 자료가 공유돼 있다. 자료에 문제가 있는지 ppt 장표를 넘겨가며 체크, 그리고 문제없음. 그래도 마음 한편에서 불안이 올라온다. 시합 전과 같은 긴장감. 덜 긴장한 것처럼 보인다면 감정을 처리하는 데 다소 버퍼링이 걸리는 성격 탓이다.


이 새로운 도전을 시합에 비유하자면, 오늘의 내 시합장은 잠실학생체육관 같은 체육시설이 아니다. 소셜벤처들의 공용 사무실인 성수동의 코워킹 스페이스. 그곳 4층에 자리한 10인용 회의실. 여기가 뭔가를 도전할 나의 시합장이다.


오후 2시. 진행자가 오프닝 멘트를 시작했다. 그다음부터 내게 40분의 발표 타임이 주어졌다. 누군가의 리드 없이 혼자 말해야 한다. 질의응답까지 감안하면 한 시간 30분 정도 계속 말해야 한다. 이렇게 오래 계속 말한 적이 있던가. 집에서부터 발표 장소까지 이동하는 동안 발표 대본을 몇 번씩 읽고 왔다. 그래도 괜히 최악의 상황이 떠오른다. 긴장감이 지나쳐 갑자기 말을 멈추거나 버벅거릴지도 몰라.


살짝 마음에 주문을 걸었다. 미리 걱정하지 말자. 실제로 실수를 해도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생각할 일이다. 최악의 실수를 해도 어떤 방식으로든 수습된다. 발표 대본에서 기억나는 말을 잘 말해보자. 기억 안 나면 그때부터 떠오르는 말들을 해보는 거야. 믿자. 믿어보자.


시작은 한 통의 메시지로부터


이런 상황은 그간 쌓아온 나의 일 경험과 관련 있다. 최근에 ‘커뮤니티’란 말을 중요하게 쓰는 분야에서 일했는데, 그때 알게 된 커뮤니티 멤버십 서비스에 가입하면서 재미있는 일과 사람들을 만났다.


이 커뮤니티의 참여자들은 ‘슬랙'이라는 전용 채팅 서비스를 활용한다. 그곳의 여러 주제 채팅방 가운데 내가 제일 활발히 말했던 곳은(검도 덕후라 당연한가) 헬스채널.  그 방의 다른 사람들처럼 운동 인증을 해왔다. 그러던 중 커뮤니티 운영진으로부터 개인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경험공유회의 호스트로 모시고 싶어서 메시지 드렸어요."

“으악(ㅋ를 좀 많이 썼다). 제가요...?”


이 커뮤니티의 콘텐츠 중에는 ‘경험공유회'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커뮤니티 멤버가 개인의 일과 생활 영역에서 인사이트가 될 만한 이야기들을 엮어 공유하는 자리다. 원래 오프라인에서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자리였지만 코로나 상황으로 온라인 화상채팅으로 대체되어 온 프로그램. 여기에 내가 나가게 된 것이다. 나로서는 경험공유회에 나가는 것도 처음, 온라인 화상 발표도 처음. 모든 처음은 정말이지 무섭다. 첫 시합도 무서워.


“해볼게요. 공유할 이야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처음이라 저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수락 감사해요! 검도와 자신이 어떻게 관계 맺으며 변화하고 있는지만 잘 알려주셔도 재미있는 공유회가 될 것 같아요.”


내 안의 쫄보 세포가 잠시 마비됐나. 나는 메시지에 답신을 하며 ‘하겠다'라고 말하고 말았다.


운영진 입장에서는 꾸준한 운동과 건강이 모두의 화두일 거라는 점, 오랫동안 검도 수련을 해온 입장에서 경험을 나눠주는 게 유의미할 거라는 설명이었다. 발표의 방향을 고려하며 자료와 대본을 준비했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서 계속 물음표가 떴다.


한 운동을 오래 덕질한 이야기라니. “누가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갖겠어?” 영화 ‘작은 아씨들'의 둘째 딸 조가 했던 대사처럼. 그런 의문이 들었다.  


진공 같은 발표시간


“안녕하세요. 평소에 쓰고 그리고 수련하는 사람이라고 저를 소개하고 있어요.”


이 멘트로 발표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발표 자료와 발표 대본을 번갈아 보다가, 나중에는 대본을 안 보고 발표 자료만 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반은 기억나고 반은 기억 안 나는 머릿속 진공상태의 40분이었다. “그냥 동네 주민체육센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동네언니 얘기예요" 이런 말도 했던가. 아무튼 적어뒀던 내용을 외워서 말하는 데는 영 실패였다. 어쩐지 발표를 진행하며 말할 것들이 계속 생각났다. 끝 무렵에는 준비해뒀던 내용을 용케 기억해 말할 수 있었다.


“몸에서 시작한 건강함이 마음에 영향을 주고, 그게 다시 몸에 영향을 끼치는 사이클이 있어요. 이 과정을 경험해보시면 좋겠어요.”


“몸으로 하는 성취는 단순히 건강해진다는 차원만이 아닌 것 같아요.


누가 가져가지 못하는 나만의 지식을 쌓는 연습 같아요. 몸으로 배운 건 누가 가져갈 수 없으니까요.”


나만의 지식. 이 말을 할 때 가슴께가 따끔거리고 간지러웠던 게 기억에 남는다. “실력이 참 안 는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한참 수련하다가 부상이 오기도 하고. 시합에 나갈 때는 긴장해서 울기도 했던, 심사에 나갈 때는 집중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의 장벽을 가뿐히 넘어섰던. 일일히 안 떠올라도 어딘가에 흔적이 남았을, 좌충우돌의 끝에 몸에 새겨진 것들 때문이려나.

 

감정을 곱씹을 틈도 없이 발표 마무리 후 질의응답이 진행됐다. 막바지에 발표를 들은 사람들이 나처럼 오래 혹은 기간에 상관없이 애정을 쏟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여자 풋살 팀을 꾸렸다는 사람, 새벽 수영과 무용을 해왔다는 사람, 분야는 다르지만 일상에서 각자 몸으로 하는 자신만의 성취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내가 말하고 이 사람들이 들어줬기에 완성되는 자리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릿속이 붕 뜬 가운데 발표가 끝났다. 긴장감을 내려놓으니 배고픔이 몰려왔다.  


현장 운영진들에게 감사인사를 건네고 나오는 길. 코워킹 스페이스 건물을 나왔는데 운영진 분이 청중의 채팅 내역이 담긴 텍스트 파일을 전달해주었다. 재미없어서 조용했으면 어떡하지. 막 웃기게 말한 것 같진 않은데.



전달받은 텍스트 파일을 핸드폰으로 열었다. 웬걸.


“잡생각이 안 나는 상태라니 너무 좋네요!”

“입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대화를 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구나, 라는 걸 깨달으셨다는 것!

“제가 본 게 팔의 근육 갈라진 게 맞나요? 멋있어요!”


다양한 반응이 적혀 있어 놀랐다. ‘멋있어요(나한테 하는 말인가)’라던가 ‘ㅋㅋㅋㅋㅋㅋㅋ' 같은 웃음도 잔뜩 있었다. 원래 채팅방이 이렇게 사람 말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곳이던가. 발표할 때 노트북 카메라에 팔을 잠깐 비쳤는데 그 순간 갈라지는 팔 근육이 선명하게 보였던 걸까. 다들 리액션 부자들인 느낌. 이런 16명의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 경험, 쉬이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그날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검도하면서 느꼈던 경험과 감정, 그 끝에 남은 성장한 자신을 여러분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누가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갖겠어"라는 걱정이 “자꾸 말하다 보니 더 커지고 의미 있어지는구나"의 방향으로 바뀌었달까요.


1시간 반 동안 저의 쉼 없는 애정공세를 들으며 느끼셨겠지만, 나만의 시합장에서 몸과 마음을 담금질하는 검도 덕질은 (수고롭지만) 꽤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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