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하게 잘생긴 메주 앞에서
메주를 쑤고 하루가 지났다.
어제보다 좀 단단해지고
빛깔도 진하게 고와진 메주.
이제야 실감이 난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 일을 해냈다는 것.
이른 아침 무쇠 화덕에 불 지펴
하루 전에 불린 메주콩을
커다란 솥에 삶는다.
부글부글 끓어 넘치면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어느 만치 익을 무렵부터
작은 나뭇가지로 불을 조절하며
눌어붙지 않도록 나무 주걱으로
젓고 또 젓는다.
그렇게 다섯 시간쯤 콩을 삶고
네 시간 넘게 뜸 들인 뒤에
적당히 뜨끈한 메주콩을 찧어
청국장과 메주 빚기 시작.
산골에서 어느덧 아홉 번째다.
해마다 옆지기와 종일 치러내는
‘메주 쑤기’ 의식이라면 의식.
발걸음은 종종 바쁘면서도
마음만큼은 어느 해보다 덤덤했다.
어두운 밤께 일을 마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전 같음 ‘드디어 메주 쒔다’는 둥
‘산골살림 공식 일정 끝!’ 어쩌구 하며
호들갑 떨고 난리도 아니었을 텐데.
이런 차분함이 왠지 낯설었다.
메주 쑤기 전날 밤,
자루에 든 동글동글 메주콩을
염주 굴리듯 어루만지며 나에게 물었다.
‘메주를 쑨다는 건
아무리 힘들어도 제자리를 지키겠다는,
약속 같은 거야.
메주가 장이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 약속, 지킬 수 있겠니?’
바로는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올해도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다가올 시간까지 미리 다짐하기는
참말 싫었다.
하지만 그저 믿고 싶었다.
메주가, 메주 쑤는 과정이
그게 무어든 답을 던져 줄 거라고.
메주 쑨 다음 날, 눈 뜨자마자
청국장이랑 메주가 놓인 작은 방에 들었다.
그윽하게 구수한 향기가
코를 지나 온몸을 휘감는다.
아, 이다지도 아늑할 수가!
낯익은 그 내음이 참으로 푸근하여
절로 이끌리듯 그쪽으로
자꾸만 몸이 움직인다.
단단하게 네모진 메주는
보면 볼수록 듬직하게 어여쁘다.
정말이지 메주처럼만
‘잘생기고’ 싶은 마음이 가득~
메주 옆에 자리한
청국장을 감싼 이불 보따리.
물끄러미 쳐다보다가는
그만 푹 안아 버렸다.
코를 큼큼거리니 벌써부터
청국장 특유의 내음이 풍긴다.
불쑥 감격에 겨워 코끝이 시큰.
이러다 눈물 날라, 얼른 방을 나왔다.
메주를 빚으며 마음도 함께 빚을 수 있던 걸까.
산골짜기 이 자리, 이곳에서
메주랑 청국장이 제 몫을 다할 때까지
그 곁을 지켜 내고만 싶다는 마음이
샘솟는다, 이제야 비로소.
메주 띄워 장 담그고는
그걸 거른 뒤에 익기까지….
1년은 훌쩍 흘러갈 된장, 간장 농사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그 시간들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새해에도 열심히 살아 보겠다는,
약속에 가까운 다짐을 해 본다.
올해 산골살림의 끝이 아니라
다가올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저 단단하게 잘생긴
메주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