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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Dec 16. 2021

아무리 힘들어도 제자리를 지키겠다는 ‘약속’

단단하게 잘생긴 메주 앞에서

메주를 쑤고 하루가 지났다. 

어제보다 좀 단단해지고

빛깔도 진하게 고와진 메주.

이제야 실감이 난다.

올해도 어김없이 이 일을 해냈다는 것.


메주 쑤기 하루 전에 메주콩을 물에 불려야 한다. 그러면 콩이 거의 두 배로 커진다.


이른 아침 무쇠 화덕에 불 지펴 

하루 전에 불린 메주콩을 

커다란 솥에 삶는다. 

부글부글 끓어 넘치면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어느 만치 익을 무렵부터

작은 나뭇가지로 불을 조절하며 

눌어붙지 않도록 나무 주걱으로 

젓고 또 젓는다. 


그렇게 다섯 시간쯤 콩을 삶고 

네 시간 넘게 뜸 들인 뒤에

적당히 뜨끈한 메주콩을 찧어 

청국장과 메주 빚기 시작.  


잘 불린 메주콩을 무쇠 화덕에서 오래오래 삶는다.
콩이 솥에 눌어붙지 않도록 나무 주걱으로 젓고 또 젓는다.


산골에서 어느덧 아홉 번째다.

해마다 옆지기와 종일 치러내는 

‘메주 쑤기’ 의식이라면 의식.


발걸음은 종종 바쁘면서도

마음만큼은 어느 해보다 덤덤했다.

어두운 밤께 일을 마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전 같음 ‘드디어 메주 쒔다’는 둥

‘산골살림 공식 일정 끝!’ 어쩌구 하며

호들갑 떨고 난리도 아니었을 텐데. 

이런 차분함이 왠지 낯설었다. 


메주콩을 염주 굴리듯 어루만지며 나에게 참 어려운 물음을 던졌다.


메주 쑤기 전날 밤,

자루에 든 동글동글 메주콩을 

염주 굴리듯 어루만지며 나에게 물었다.


‘메주를 쑨다는 건
아무리 힘들어도 제자리를 지키겠다는,
약속 같은 거야. 
메주가 장이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 약속, 지킬 수 있겠니?’ 


바로는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올해도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다가올 시간까지 미리 다짐하기는

참말 싫었다.


하지만 그저 믿고 싶었다. 

메주가, 메주 쑤는 과정이

그게 무어든 답을 던져 줄 거라고.  


단단하게 네모진 메주는 보면 볼수록 듬직하게 어여쁘다.
볏짚 콕콕 박아서 만드는 청국장.


메주 쑨 다음 날, 눈 뜨자마자 

청국장이랑 메주가 놓인 작은 방에 들었다. 

그윽하게 구수한 향기가

코를 지나 온몸을 휘감는다. 


아, 이다지도 아늑할 수가!


낯익은 그 내음이 참으로 푸근하여

절로 이끌리듯 그쪽으로 

자꾸만 몸이 움직인다.


단단하게 네모진 메주는

보면 볼수록 듬직하게 어여쁘다. 

정말이지 메주처럼만

‘잘생기고’ 싶은 마음이 가득~  


메주 옆에 자리한 

청국장을 감싼 이불 보따리. 

물끄러미 쳐다보다가는 

그만 푹 안아 버렸다.

코를 큼큼거리니 벌써부터 

청국장 특유의 내음이 풍긴다. 

불쑥 감격에 겨워 코끝이 시큰.

이러다 눈물 날라, 얼른 방을 나왔다.   


청국장을 감싼 이불 보따리에서 벌써부터 특유의 냄새가 올라온다.


메주를 빚으며 마음도 함께 빚을 수 있던 걸까.  

산골짜기 이 자리, 이곳에서

메주랑 청국장이 제 몫을 다할 때까지

그 곁을 지켜 내고만 싶다는 마음이

샘솟는다, 이제야 비로소.   


메주 띄워 장 담그고는

그걸 거른 뒤에 익기까지….  

1년은 훌쩍 흘러갈 된장, 간장 농사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그 시간들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새해에도 열심히 살아 보겠다는, 

약속에 가까운 다짐을 해 본다.  


올해 산골살림의 끝이 아니라

다가올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저 단단하게 잘생긴

메주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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