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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Apr 06. 2022

무엇을, 왜 지키고 싶은가

땅과 책과 농부 그 사이에서

밭일 한창 하다가

햇빛 가리는 모자, 흙 묻은 일옷 

그대로 쓰고 입고서 마을회관에 갔다.

군에서 주는 재난지원금 받으러 오라기에. 


“일하다 왔나 봐요.”


오랜만에 보는 아줌니가

웃으면서 말을 건넨다. 


“네.”


주위를 둘러보니 나뿐만 아니라

다들 일하다 온 분위기가 물씬하다.

반가운 마음 가득하지만

모두가 바쁜 때이고 

나 또한 그러한지라,

어느 분이 내주는 봉투 받아들고는

냉큼 밭으로 돌아왔다.  


봄볕이 어느새 땡볕이라

해를 등지고 일해도 

얼굴이 금세 벌겋다. 

여름 볕에 견주면 이쯤이야,

호미 쥔 손을 계속 부린다. 


(그나마 지난해 모질게 맘먹고

고랑에는 부직포를 깐 덕에

김매기가 전보다 한결, 월등히 낫다. 

아, 이래서 다들 비닐을 치는구나,

완전 몸으로 이해함!) 


손마디 아프고 허리는 휘청이는 김매기. 그럼에도 나는 이것을 지키고 싶다.


가까운 밭에선 트랙터가

열심히 일하고 있다.  

푸른 풀이 넘쳐나던 밭이 

엄청 짧은 시간에 말끔해졌다.  

처음 보는 장면도 아닌데

참 신기하기만 해서 

자꾸만 눈길이 간다.  


호미 쥐고 풀 뽑는 내 모습과

트랙터가 밭을 갈아엎는 장면이

고작 십몇 미터 사이를 두고

펼쳐지던 순간.  

마음 깊이 새겨둔

책 제목이 떠올랐다, 떠올렸다.


소설가 김탁환이 쓴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서럽도록 추웠던 지난겨울,

이 책을 한 자 한 자 마주하며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무엇을 지키고 싶은가. 
왜 지켜야 하는가, 
왜 지키고 싶은가. 

매서운 날씨 따라

마음도 한없이 추워서였을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겨울을 견디는 사람만이 다시 씨를 뿌린다.”_(269쪽)


책 속에 담긴 이 문장을 보면서는 

그저 생각해 보기도 했다.

추운 날들이 지나고 나면 

내 마음에도 저절로 봄이 찾아올 거야.


그러면서도 겨울이 가지 않기를

마냥 바라기도 했다. 

어김없이 찾아올 밭일들, 

허리 아프고 손마디 저리는 그 시간을 

맞닥뜨리기가 겁이 나기도 했다. 

어느덧 아홉 해째 땅과 더불어 살고 있으면서도, 

한겨울 내 마음이 그랬다. 


세상에나~

진짜 봄은 후딱 오더라.

아직은 자연의 시간에 

몸이 맞춰져 있지 못했는지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몸이 그에 따를 수 있는 나.

땅으로 첫걸음 하기 전까지

어찌나 버둥거렸는지.    


그럴 때마다 나는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에 나오는

아래 글귀를 주문처럼 되뇌곤 했다. 


“지키고 싶다면, 반복해야 한다. 예측도 말고 습관도 버리고, 당장 뛰어들 것!”_(150쪽)


지키고 싶은 게 무언지도 모르는 나에게  

책에서 건진 이 주문은 

몸과 마음을 함께 일으키는 길에

적잖은 힘이 되었다. 


소설가 김탁환이 쓴 책,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지키고 싶은 게 무언지 찾지 못하는 나에게도 이 책은 힘이 되었다.


하루해가 서서히 저물 무렵,

트랙터를 써서 로터리 친 밭에는

어느새 비닐까지 말끔히 쳐 있었다. 

그 깨끗한 땅에도 어김없이 약을 뿌리는 

농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트랙터를 부리고 비닐을 씌우고

잡초의 뿌리부터 없애려는 

약을 치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지키고 싶은 것이 

농사든 식구들 생계든 또 다른 무엇이든 간에

‘아름답다’는 칭송을 한껏 건네고만 싶었다. 


호미를 잠시 내리고

내 앞에 놓인 흙무더기를 더듬었다. 

보드랍다. 정말 보드랍다. 


순간, 뭔가 내 안에서 일렁거렸다.  

촉촉하게 보드라운 이 흙을 지키고 싶다는, 

정말 단순한 어떤 마음이.


피땀 어린 농사를 두고 

이렇게 낭만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데, 

싶으면서도 그랬다. 어쩔 수 없이.


어디 그뿐인가. 

열심히 김맨 밭을 옆지기가 퇴비 넣고

괭이 부리면서 둥그스름하게

이랑으로 만든 모습에는

“아, 아름답다!” 하는 감탄이 저절로 터진다.


고랑에는 부직포가 있다 해도

이랑에는 흙빛이 아롱거리는 

선하게 둥근 이 밭의 모습 또한

지키고만 싶다고,

또 한 번 생각이 들고야 만다.  


흙빛이 아롱거리는, 선하게 둥근 이 밭의 모습을 지키고 싶다.


오늘의 밭일을 마치고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에서 

밑줄 좍 그었던 어느 문장을 다시금 곱씹는다.  


“내 시간과 노력을 쏟는 대상에 대한 짙은 관심과 지독한 애정,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믿음이 특별한 경험을 만든다. 농부에게 그것은 논과 밭을 이루는 땅이고, 어부에겐 바다나 강이다.”_(91쪽)


‘관심, 애정, 믿음.’ 

땅이건 밭이건 농사건 

나에게 모두 모자란 것들이다. 


그럼에도 손가락 마디마디가 

느껴낸 흙의 아름다운 감촉만큼은

올봄 김매기가 안겨준 

특별한 경험인 것만 같다.  


지키고 싶은 것이 다가왔으니

내일 밭으로 가는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울 것 같다. 


무엇보다, 

땅과 더불어 보내는 이 시간. 

앞으로의 나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의 나는 지켜줄 것 같다는 

믿음이 싹트는 것도 같다.  


잘 자라든, 잡초가 되어 뽑히든

모든 싹은 무조건 아름다우니까,  

그 무어든 마음에 싹튼 그걸로 좋고 또 고맙다. 


“지나온 풍경은 아름답고 쓰라렸다. 빛나는 순간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고 부끄러운 찰나는 삭제가 불가능했다.”_(25쪽)


아름다움과 쓰라림이

어쩌면 한 묶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저 문장을 보면서 해봤다. 

되게 마음이 시렸다. 


빛나는 순간, 부끄러운 찰나. 이 모두를 땅에 묻어 보련다. 거름이 되어도 좋고 그저 사라져도 좋으니.


돌아가고 싶은 빛나는 순간, 

삭제가 불가능한 부끄러운 찰나,

나를 흔들고 힘들게 하는 

그 모두를 몰아서 흙에다 묻어보고 싶다. 

거름이 되어도 좋고, 그저 사라져도 좋다.

그저 내 안에서 떠나보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밭으로 나갈 내일이 기다려진다.

기다리는 내일이 있는 지금 이 순간,

그 또한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은

사월의 어느 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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