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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골짜기 혜원 Jan 18. 2022

귀촌을 앞둔 설렘과 불안, 추억의 책장을 펼치며

귀촌 9년 차에 다시 보는 책 ‘텃밭 속에 숨은 약초’와 함께

산골에 터를 잡기 전, 

자연, 생태, 농사와 이어진 책을 많이 찾아봤다. 

제대로 소화되는지도 잘 모른 채 꾸역꾸역 읽고 또 읽었다. 

그러곤 대부분 다시 보지 않았다.  


귀촌을 앞둔 설렘과 불안이

먼지처럼 묻어나는 그 책들 속에서,

어느덧 귀촌 9년 차가 되어 가는 나에게

유독 한 권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두툼하게 잡히는 <텃밭 속에 숨은 약초>.

추억의 책장을 펼쳐 본다, 

느릿느릿하게 때론 후루룩. 


밑줄이 꽤 많다. 거의가 옆지기 흔적. 

흐릿해진 연필 선을 보면서 아릿하게 먹먹했다.


‘새로운 삶터에서 어떡하든 

잘 살아 보려고 참말 애썼구나. 

책 한 권도 치열하게 파고든 

당신 덕에, 그런 당신 따라서

나도 이만큼이나마 

농부 흉내를 낼 수 있었구나….’


옆지기의 흔적, 흐릿해진 연필 선을 보면서 아릿하게 먹먹했다.


내용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한참 전 완독한 것만은 기억나는 

이 책을 다시금 펼쳤다. 

텃밭살이로 지친 내 안에

싱그런 첫 마음을 불어넣고 싶다는, 

알량한 기대감을 안고서.


한 번은 읽었으니 대충 훑어볼 마음이었다.

꽤 두껍기도 하니까. 


웬걸, 이게 웬걸~. 나 이 책 본 사람 맞나?

약효들은 조금씩 눈에 익는데

다른 글은 처음 보는 것만 같다. 


텃밭 농사짓는 한의사로 살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서 

우려낸, 우러난 이야기들. 

글쓴이가 포도 맛을 그린 어느 문장처럼 ‘참 순하고 깊었다.’ 


“지구별의 수많은 곳을 탐험하고 여행하는 일도 멋지지만, 어쩌면 또 하나의 삶의 여행은 어느 곳에선가 뿌리를 내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살아가는 일이 아닐까, 그곳의 수많은 존재들과 관계를 맺어 가고 서로를 알아가면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신의 쓰임을 뿌리에 감춘 채 살아가는 취나물을 바라보며 합니다.”_409쪽  


텃밭 속 약초 이야기에는 몸에 좋은 내용은 기본이요 

‘마음 챙김’에 도움 되는 글도 많고 많았다. 

어떤 문장은 정말 좋은 나머지 하나하나 손으로 새기기도 했다. 

내게 준 감동과 깨우침을 잊지 않으리라, 꾹꾹 다짐하면서. 


시든 내 마음에 약초처럼 스민 책, <텃밭 속에 숨은 약초>를 귀촌 9년 차에 다시 펼친다.


책에 나오는 약초는 모두 100개.

거기서 내가 길렀거나 채취했거나 어떤 식으로든 

손으로 만지고 먹어 본 것들이 62가지였다.

참 우습게도 그게 그렇게나 위로가 되었다. 


‘산골살이 9년째. 아, 그동안 헛살진 않았구나. 서울선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을 이만큼이나 보고 만지고 느꼈으니 그것만으로도 잘한 거야, 잘 살아왔다고 생각하자.’


차례에 나온 약초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보며 

남모르게 찌든 내 마음을 토닥토닥 달래 주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겪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올봄 저는 살아갈 길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떠나면 무슨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떠난다 한들 제가 변하지 않는 한 그 문제는 언제고 저를 붙들어 맬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봄 산수유 꽃을 보면서 든 생각은 여기서 건강히 살아내지 못한다면 어딜 가든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지금 여기서 충실히 살아내 꽃을 피워낼 수 있어야 그 어떤 곳에서도 제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_162쪽


“장화를 신고 뒷밭을 걸으며 밭 식구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그러면 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 이유도 없는 조급한 마음에 제가 얼마만큼 와있는지도, 어디로 가려는지도 모른 채 막연한 두려움에 답답해했던 모습을 돌아봅니다. 이런 순간에는 어떤 말보다도 밭 식구들의 충만하고 온전한 침묵이 가장 큰 위안이 됩니다.”_268쪽  


이 겨울, 산골 텃밭은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이렇게 다 지고 말 것을, 왜 그리도 아등바등했던가. 

허망하다 못해 섧기까지 해선 애써 외면할 때도 많았다. 


이렇게 다 지고 말 것을, 작은 텃밭 안에서 왜 그리도 아등바등했던가.


내 마음에 약초처럼 스민 책, 

<텃밭 속에 숨은 약초>와 다시 만나며

저절로 발길이 텃밭에 머물곤 했다. 


차가운 땅 밑에서 치열하게 버티며 살아내고 있을

마늘과 도라지.

스러진 이파리 사이로 다음 해 다시금 꽃피울

딸기, 부추, 쪽파, 대파, 고들빼기….

꽝꽝 언 흙 위에서도 초록빛을 품고 있는

이름 모를 풀들까지.  

“그 충만하고 온전한 침묵”을, 

스러졌으되 쓰러지지 않은 생명력을 닮고만 싶다.  


텃밭 곳곳을 하나하나 살피며 돌아 나오는 길, 

불현듯 코끝이 시려 온다. 

이것은 감동인가, 서러움일까....

뜨거운 무엇이 마음에서 치달아 오른다.  


차가운 땅 밑에서 치열하게 버티며 살아내고 있을 마늘 싹이 시리도록 푸르다. 
꽝꽝 언 흙 위에서도 초록빛을 품고 있는 대파, 그리고 이름 모를 풀들.


“가고 가고 가는 중에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고 행하는 중에 깨닫게 된다”는 

책 속 글귀를 천천히 곱씹는다.  


두렵고 막연하고 힘들어도

아니, 그럴 때일수록 더 더  

묵묵히 가고, 가고 또 가야만 하겠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새

따스한 봄이 저만치 와 있겠지. 

메마른 저 산골 텃밭 곳곳에

그리고

시나브로 시든 내 마음밭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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